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퇴직 후 몇 개의 신문을 15년 이상 구독하면서 지면에 칼럼을 쓰는 분들 중 마음에 와닿는 글의 목록을 만들고 좋은 글들을 내 메모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CBS 라디오 프로듀서인 정혜윤이 한 신문에 ‘내 마음속 도서관’이라는 고정란에 쓴 “미소 짓고 장난치고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상처 입히는 말을 쏟아내는 입술로 변하는 세상이 싫다”라는 글이 마음에 와닿아 역할이 바뀌어도 그분의 글을 메모하고 있다. 얼마 전 『아무튼, 메모』라는 책을 발표하면서 “메모가 사소하게 보여도 문장을 옮겨 적고 읽고 외우다 보면 자신의 삶에 자그마한 기적이 생겨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니 조금은 유별난 나의 일상에도 읽기와 쓰기의 중간에 메모가 자리 잡고 있음을 새삼 느껴본다. 나는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면서도 공부의 즐거움을 경영학 텍스트보다 신문과 책에서의 폭넓고 다양한 상식과 삶에 귀감이 되는 글, 흥미로운 내용을 그저 적고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직장 경험이 쌓이며 일이 폭주하고, 회식 등 직장문화에 적응하고, 이어진 승진시험에 집중하며 중단된 메모는 승진 후에 계속되었다. 나는 첫 승진을 한 후 순천에서 부임지인 여수를 향하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본 신문 조각에서 “신경질은 어리석음으로 시작하여 후회로 끝난다”라는 글에 생각이 오래 머무른 후 메모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한 것 같다. 또 한 차례의 승진으로 당시 농업은행 동광양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고 지역신문에 기고도 해보고 제철예비군 정신교육도 3년여 참여했으며 유관기관 직원들을 상대로 한 경제교육도 용기 내서 해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메모의 힘인가 싶다.

퇴직하고 농사와 산행과 독서 생활을 하면서 한 권의 노트는 10권이 되고 20권이 된 뒤 이제는 30권으로 늘어나며 기록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잘은 못 쓰지만 1년 이상 매주 글 한 편을 쓰는 나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하고 스스로 생각해봤다. 쓰기에 급급하다 보니 쓴 글들을 언제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저 나는 쓰고 또 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이 사랑을 받고 예뻐 보이려 노력하다 보면 점점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처럼 나도 좋은 글 아름다운 말들을 읽고 쓰고 암송하다 보면 나 또한 합리적인 생각과 고운 이야기들을 생각해 내는 것은 아닐까? 미세한 습기를 부지런히 모아서 큰 몸통을 만들며 천년을 뛰어넘는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처럼 메모는 나의 무의식 속에서 숙성되고 변화하며 큰 울림통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으로 융기되고 쌓으며, 이성으로 깎고 다듬어져 미국 서부의 그랜드캐니언 같은 장엄 하고 오묘한 형상들을 내 마음속에 만들어가고 있다고 상상도 해본다.

세상의 모든 책은 독자를 만나면 또 다른 글이 되고 스토리가 된다. 좋은 문장을 마음에 품고 살면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일까? “독서를 통해 인간은 어휘 등 표현 능력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오감이 예민해지고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향상되고 느닷없는 문제에 대비하는 힘이 강해진다”라는 말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텍스트는 독자가 상상력으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될 심연과 여백을 창조한다” 했는데 타인의 글을 보며 수긍하고 의문도 가지며 붙잡고 씨름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생겨나는 것일까?

메모장을 스스로가 보아도 꾸준함의 결과가 놀랍기만 하다. 한 자 한 자 적은 것이 이렇게 많은 양이 된 것이다. 이따금 집에 오는 손자들이 늦잠을 자고 서재로 와서 아침 인사를 하면서 독서와 메모를 하는 나의 모습과 메모 노트를 보며 “이것이 전부 다 할아버지가 기록한 것이야?” 하며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부심을 느끼고 손자들이 독서를 즐기고 습관으로 갖기를 희망도 해본다. 자식들도 저마다 맡은 분야에서 노력하며 인정받는 모습들이 믿음직스럽기도 하다.

농사도 따지고 보면 삽과 괭이로 땅을 파 고르고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정성 들여 가꾸면서 싹이 뜨고 줄기가 뻗고 잎이 달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영그는 변화와 순환의 과정을 메모처럼 꼭꼭 마음에 새기며 체화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심전심일까? 산에 오르는 것도 한 발 짝씩 오르고 내리며 잎과 꽃, 낙엽과 그루터기를 보면서 생명의 순환과 다양성의 소중함을 역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때론 꿩병아리를 보고 기뻐하고 때론 뱀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며 인생의 양면을 경험하기도 한다. 좋은 글을 보면 가슴이 뛴다. 삶에서 부딪치고 관심을 끄는 주제들 앞에 부족한 사람이 갖는 사유의 방황이 한 가닥씩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오늘도 한 문장을 메모하며 글을 맺는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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