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황동규 - 황동규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시인 황동규
-1938년 평남 연유 출생
-아버지 황순원
-서울대 명예교수
-1958년 현대문학 ‘시월’ 등단
-만해 대상 외 다수
-시집 <사는 기쁨>외 다수

황동규를 내게 툭 던진 건 작은 형님이었다. 아니 작은 형이 불그레한 얼굴로 앉은뱅이책상 서랍 속 김수영 시집 밑에 숨겨둔 편지에 그가 숨어 있었다. 형이 차마 보내지 못한 연애편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연한 수순인 듯 대학 1년을 마치고 몇 개월 놀다가 ‘빡빡’ 머리를 밀고 저녁 늦게 집으로 들어와선 새벽밥 먹고 혼자 버스를 타고 입대했던 작은 형의 편지는 색이 좀 바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형의 빈방에 들어가 여기저기 뒤집어엎는 못된 손버릇을 지녔다고 미루어 짐작지 말 일이다. 어차피 형의 빈방엔 골치 아픈 법전 따위나 펼쳐보기도 겁나는 붉은 계열(?)의 사회 서적뿐이어서 제법 흥미를 불러 일으킬만한 여지도 없었다.

내가 형의 빈방에 침입하게 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형이 입대하고 한 일 년쯤 흘렀을까. 여름방학을 맞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실컷 놀고 있는데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처럼 어머니가 받았는데 평소와는 달리 다급히 나를 불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수화기를 내게 내밀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급히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형의 지도교수였다. 지도교수는 “입대한 형이 무슨 사고를 친 모양”이라며 혹시 문제가 될만한 서적들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 기무사에서 군인들이 곧 들이닥칠 거라면서 말이다. 교수의 말에서 긴장감이 묻어나서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형의 빈방이었다. 서둘러 그 붉은 계열의 인문사회 서적을 포대에 밀어 넣고 <민중의 바다(피바다)>, <꽃 파는 처녀> 등 금서들도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포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손을 댄 게 형의 앉은뱅이책상이었다. 그렇게 읽게 된 형의 편지는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보낸다’로 시작하더니 낯 뜨거운 고백의 단어들이 행간마다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닭살이 돋고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품은 연정을 이해할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형의 고백 상대는 나도 수년째 알고 지내던 교회 누나였다. 형은 아마도 1년을 넘게 짝사랑에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써놓은 편지조차 보내지 못한 채 덜컥 입대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의 편지는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로 시작하는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노래>라는 시를 무단 차용, 그걸 또 변형한 것이었다. 그렇게 만난 황동규였다.

황동규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필명을 떨친 황순원의 아들이지만 굳이 아버지를 그의 이름 앞에 내세울 일은 아니다. 그건 어쩌면 황동규에게는 예의가 아닐 것이다. 이미 그 이름이 한국시단에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일제와 해방을 경험한 젊은 청년 황동규의 초기작들 대부분은 겨울이었다. 싸늘하고 헐벗은 채다. 하지만 이후 그의 시들 대개는 봄날이다. 심지어 발랄하기까지 하다. 특히 연서 형식의 시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잘 써진 소설을 읽는 것처럼 막힘 없이, 평안하게 읽어지는 매력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들은 연애를 시작하는 청춘들에 의해 곧잘 소환됐다. 내 빛나던 청춘의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첫머리에 앉힐 만한 게 시 <즐거운 편지>다. 거의 20년만에 처박아 둔 황동규를 다시 꺼내 읽는다. 연애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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