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시인 고정희

  1. 년 전남 해남 출생
  1. 년 현대시학 등단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시집 <초혼>외 다수

  1. 년 6월 지리산 실족 사망

 

그의 죽음을 통해 그를 알았다. 한참 ‘동네 방위’로 군 생활을 대체하고 있을 시기였다. 8월 소집해제를 앞두고 방위들 세계에선 결코 흔할 수 없는 군기교육대 서너 차례 돌고 돈 정훈병이었으니 간섭하는 놈 하나 없이 정훈실에 혼자 처박혀 있는 나날이 많았는데 어느 날 한 달 고참이면서 친구이기도 했던 용민이가 광양읍 부영아파트 부근 동춘원에서 소주 한잔할 것을 제안한 날이었지 싶다.

궁핍한 중에도 짬뽕 국물에 탕수육 한 접시를 시켜놓고 소주 두어 병을 마셨을까. 요의를 느끼고 낡은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빈 소주병을 채운 채 멍이 든 박스 위에 놓인 오래된 신문 구석을 메우고 있던 작은 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시인’이 먼저 눈에 띄었을 테고 ‘지리산 실족사’라는 단어가 뒤따라 떠올랐을 터였다. 고정희라는 다소 생경한 이름은 아마도 가장 나중 자리에 있었겠다. 이후 서점을 찾아 <초혼제> 등 고정희의 시집들을 찾아 읽으면서 훌쩍 생을 버린 그를 조우했다.

그의 시 특징은 낮고 고통받는 자와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도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외려 희망을 읊조린다는 데 있다. 다소 강한 어조다. 생명을 바라보는 태도는 애정이 묻어났고 그래서 절망 가운데 있으면서도 절망에 붙잡혀 있지 않았다.

특히 5.18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이후 그의 시는 전통적인 남도의 씻김굿과 남도의 가락을 빌려 핍진한 민중의 삶을 위로하는데 이르렀고 그가 토해내는 말들은 그래서 오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처럼 깊었다.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 역시 고정희 특유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 시 가운데 하나다. 우회로를 찾지 않고 첫 문장부터 ‘상한 갈대라도’ ‘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순 돋거니’라고 직설화법을 쓴다. 그리곤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라며 주저앉는 자들을 채근하여 일으켜 세운다.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는 작은 희망을 놓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 그렇게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라는 작정으로 혹은,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는 버팀과 전진을 통해 뚜벅뚜벅 걷다 보면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다는 믿음이 생의 기저를 이루고 있음을 그는 알았다. 아니, 그는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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