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여인숙 1997 - 최인철

진도여인숙 1997

최인철

 

선운사 동백꽃 보고

갯가를 따라 흘러들다

남도땅 진도

몸 지치고 마음 지쳐 누운 방에는

밀기울 같은 파도가

쉴 새 없이 바다를 건너고

찬바람 소리만 음탕하게

부두에 살 내린 동백꽃 붉은 옷깃을

한 꺼풀 한 꺼풀 헤집고 있다

바람 앞에 서면 먼 객지,

남루한 일생과 딱히 돌아갈 곳 없는 몸을

낡은 가방 안에 구겨 넣고 떠나는

사내들의 흙 묻은 발소리

거친 성기 끝으로 헛되이 망명을 꿈꾸던

간밤 하루짜리 사랑들이 황급히

주저앉은 여인숙을 빠져나간다

 

밀물 들어서 긴 하늘

굽이굽이 파도는 매섭고

“이미자를 좋아했어요

제가 동백아가씬 줄 알았다니까요”

제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살았다는

전라도 함평産 가시내 웃음 뒤에 숨어

동백 꽃잎 빨갛게 멍들어갈 무렵

물이랑 치는 여인숙 쪽방엔

물컹한 가시내 정절만 소복소복 쌓이고

슬픔도 적멸 드는 눈 오는 새벽

해남행 완행버스가

소읍의 주저앉은 상점들을 차장에 매달고

절름발이처럼 출렁거리며 거리를 빠져나가면

딸꾹질하듯 비틀거리며 기어이 아침은 오고

뱃고동 소리 정박하는 바닷가 여인숙엔

바튼 기침을 쿨럭이던 몇몇의 사내가 다시,

죽음처럼 깊은 잠을 이끌어 들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 남구 진월동 친구의 집에서 빌붙어 살기를 두 달쯤 하고 나니 삶이 참 심심해졌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급기야 관 속에 들어앉은 시체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몇 푼 되지 않는 현금을 손에 쥐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그리고 이리저리 떠돌다 쥐고 갔던 현금이 바닥을 보일 무렵 다다른 곳이 진도였다. 3월 중순께였으므로 갯가의 바람은 매서웠다. 기왕에 떠난 길이니 좀 더 떠돌아 볼 요량으로 날 일거리를 헤매다 찾은 곳은 비린 바다 내음이 바투 코를 찌르는 바닷가 한 농원이었다. 한 달 정도 일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던 농원 주인은 빈방 하나를 내주었다.

농원 주인을 따라 거름을 나르는 등등의 허드렛일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주인과 술상을 가운데 두고 주고받는 일도 일꾼에겐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김대중 선생을 아주 흠모하는 사람이어서 맞장구를 쳐주면 그렇게 흐뭇할 수 없다는 얼굴로 가끔은 꼭꼭 숨겨두었던 양주가 술상에 놓이기도 했다.

그곳으로 떠나기로 한 날 농원 주인은 나를 진도 읍내까지 데려주었다. 내쳐서 식당으로 데려가 삼겹살을 구워줬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 일”이라며 제 나름 격려 역시 잊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엔 적잖이 부러운 눈빛이 머물렀다 떠나기도 했다.

식당을 나온 그는 어차피 막차가 끊겼다며 읍내 뒷골목 허름한 여인숙에 나를 부려놓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날 밤 퀘퀘한 냄새가 방안 가득한 여인숙에선 밤새 누군가가 토해내는 토악질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런 와중에도 뜨거운 살 내음이 벽을 타고 넘어왔다.

그날 아직 밖이 어두운 새벽에 눈을 뜬 나는 해남 가는 첫차를 타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섰는데 그날 건너온 진도대교, 그곳에서 만난 바다가 무척이나 사나웠다. 거친 성대를 가진 울돌목이 사납게 울어댔다.

그리고 나는 또 어디로든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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