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곁에서 - 조태일

이슬 곁에서
조태일

안간힘을 쓰며
찌푸린 하늘을
요동치는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저 쬐그만 것들

작아서, 작아서
늘 아름다운 것들,

밑에서 밑에서
늘 서러운 것들

조태일 시인

  1. 년 전남 곡성 출생
  1. 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아침선박 당선

시집 <국토>외 다수

  1. 년 만해문학상 외 다수
  2. 년 9월 간암으로 사망

1997년 가을, 광주대학교 근처 지하에 내려앉은 호프집에서 만난 조태일은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는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맥주와 담배는 그의 일생을 그려내는데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벗과도 같았는데 그날 역시 낮게 내려앉은 호프집 한켠을 차지하고는 제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해 여름 친구 몇몇과 인연을 맺고 지리산 화개골에 죽치고 살다가 드디어 자신의 처녀작을 무대에 올리고 상투를 틀고 연출가의 길을 시작한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다가 만난 조태일의 모습은 바로 그러했다. 이제 막 연출가라는 운명 위에 첫발을 디뎠던 친구 역시 조태일의 제자였음으로 자연스럽게 합석하게 된 자리였다.

꼰대가 아니될 수 없었으나 그의 곁에는 꽤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사내와 계집애가 섞여서 그의 입을 통해 들려올 말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는 말보다 술의 세계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물론 손에 들려 한없이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는 그가 차린 제단 위에서 느리게 불타는 향과 같았다.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강물을 이뤘으나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역시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중에도 조태일의 모습은 곰방대를 손에 쥔 채 동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술독을 지닌 사람처럼 급하게 잔을 넘기던 술꾼의 모습이다.

지금도 가끔 태안사 입구를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는 조태일시문학관에 들리면 이제는 늙어버린 그의 자필 원고지 곁을 지키고 있는 곰방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 돌아오곤 한다. 그러면 꼴깍꼴깍 그의 목울대를 넘어가던 맥주가 그려지는 것이다.

조태일은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태안사를 지키던 대처승이었는데 아버지는 그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버렸고 그의 가족은 여순사건의 여파가 산을 타고 태안사까지 이르자 여러 차례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 광주로 나왔다. 그리고 성년이 된 조태일은 시를 썼다.

등단 초반 조태일의 시선은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니 그 기조는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짓밟히고 짓밟혀도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그려내면서도 민중을 억누르는 권력에는 서슬 퍼렇게 날이 선 언어로 고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 시인이었던 그는 과거 군부독재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전환되자 초대 상임이사를 선뜻 맡는 등 저항성을 고집하면서도 시는 자연과 생명으로 외연을 확장했다.

특히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가 천착한 것은 동심이다. 그즈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나 냇가를 떠도는 피라미떼, 달빛, 이슬, 실개천 등이다. 현실비판을 넘어섬은 물론 자연과의 폭넓은 교감을 통해 참여적 영역을 과감히 탈피하는 변환을 보여주면서 드러내지 않았던 서정성의 창고를 세상에 개방한다.

말년에 쓴 시들을 모아 죽기 직전인 1999년 출간한 시집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는 그러한 그의 죄 없는 변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오늘 만난 시 ‘이슬 곁에서’ 역시 그 범주를 이루는 시 가운데 하나다.

‘요동치는 우주’를 떠받드는 ‘이슬’이라더니, ‘작아서, 늘 아름다운 것’들이라더니, 결국엔 ‘밑에서 밑에서, 늘 서러운 것들’이라며 어린 손주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마음처럼 측은해 하는 것이다. 청장년 조태일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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