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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해방과 김완근 공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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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12  21: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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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때는 조선 오백년이 저물어가는 석양 안동김씨 쇄도정치 삼대(순.헌.철)60여년이 끝나고 고종 집권기인 대원군(이하응)섭정 10년이 들어가면서 민비가 집권한지 2년차인 1875년 1월 17일. 광양에서는 우산(쇠머리)을 진산으로 좌로는 벽계수와 같은 봉강(서)천이 흐르고 우로는 옛날 도선이 목욕했던 청계수가 흐르는 옥룡(동)천을 끼고 앞으로는 광양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신기마을 (구산리134)에서 첫울음을 터트리고 태어난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훗날 종심(칠십)을 넘기신 나이에도 해방(1945)을 맞아 광양군 자치위원회의 대회장(大會長)를 거쳐 광양군 건국위원장으로 선임되신 김완근(金 完根)公이다.

그는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바탕으로 자라면서 조선 후기 어두웠던 외세침략기와 일제강점기(3.1운동)를 봐오면서 젊어서부터 이 고장에서 한 시대를 살면서 같은 지식인이면서도 남달리 민족운동의 중심인 농민세력에 규합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해방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애향심이 깊은 우리 지역의 리더십 인사였다.

그에 활동을 잠시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 소작쟁의를 이끄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소작쟁의는 항일운동으로 이를 통하여 일본인 지주와 친일 지주에 대해 소작조건 개선 등 농민들의 경제적 보상 요구와 일제의 경제정책에 대항하는 성격으로 반일운동으로 전개하였다.

광양의 소작쟁의는 1923년 1월에 처음 발생이 되었으며 그 뒤 같은 해 4월에 김완근을 비롯, 정진무·정원선·박종선·변정섭·서삼식 등 광양천도교 청년회원들이 주동이 돼 각마을 소작인대표와 연계하에 고율(高率)소작료와 소작권 박탈에 대항하여 경찰의 탄압에도 소작인 500여명이 박탈된 토지를 경작케하는 등 광양의 소작쟁의는 1925년까지 지속되는데, 그는 우리 지역 소작쟁의 운동에 선도적으로 활동하여 항일 농민운동에 선봉이 되었다.

또한 그는 정진무 등과 함께 우리 지역 농민운동지도자로 1925년 무렵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기소되어 1928년 2월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에도 민족해방운동 단체인 신간회 설립에 발 벗고 나서 1929년 9월 8일 창립총회를 가졌으며 당시 그는 신간회 광양지역 집행위원책무를 맡으면서 우리 지역 청년·노동운동 핵심인물로 부상하면서 일제에 대항해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농민을 위한 투쟁에 헌신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광양군에서는 좌, 우파가 합동으로 동년 8월 17일 광양서초교에서 해방축하 군민대회을 열었다. 교정에 모인 2천여명의 군민들이 일장기에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나와 감격의 눈물과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는데 이날 조직된 ‘자치위원회’의 대회장은 김완근 공이 보았으며, 3일 이후 이 조직은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되면서 김완근이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동년 9월경에는 건국 준비위원회가 광양군 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다.

그후 사회주의 사상가들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단속이 심해지자 한동안 월북하였다가 6.25사변이 일어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경찰의 단속을 피해 집에서 토굴 생활을 한 달쯤 할 무렵 경찰의 단속에 검거되어 온갖 회유를 물리치자 1951년 1월 10일밤 그는 광양경찰서 유치장을 밖을 나서며 “용태(아들)야! 나는간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훗날 뒷얘기에 의하면 총살을 당하였다 하는데 시신을 못 찾아 그에 며느리(박흥아:1925)가 밤나무로 신주를 깎아 뒷산 양지바른 쪽에 가묘를 지어드렸다 한다.

한편으로는 사회주위 사상관계로 정식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경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얼마 후에 조카사위(故김옥기)는 그의 영전(가묘)에 아래와 같은 시를지어 올렸다 한다.

백골없는 무덤

구산리 산자락에/백골 없는 저 무덤아/내 고장 항일투사/님의 무덤 처량구나!/일제의 모진 탄압/굴함 없이 싸웠도다/잔악한 감옥살이/몇 개 성상 흘렀던고/모진 탄압 물러가고/해방만세 충천드니/해방의 만세소리/춘몽처럼 사라지고/허리 짤린 조국땅에 /흘린피가 얼마인가?

백색의 모진 탄압/님의 형체 간 곳 몰라/효성스런 며느리가/억굴하고 억굴해서/밤나무에 혼백새겨/님의 무덤 만들었소/반세기의 분단장벽/평화로움 꿈을꾸며/따사로운 민족혼이/평화통일 외치구나/묻지말자 묻지말자/님의이름 묻지말자/민족통일 그날이오면/님의 이름 환생하리”읽는이로 하여금 씁쓸함을 자아내는 동정(同情)의 시문인 것 같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사이며 우리 광양의 사상 및 농민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는 누구를 위해 수차례의 옥고를 치루며 해방공간에서 광양군민을 대표하는 직책을 선임받는가?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우리 군민의 살길을 선도하는 그에게 돌을 던진 사람도 돌을 던지고 싶어 던졌겠는가! 이념의 갈등으로 빗어진 시대적인 환경이었기에 누가옳고 누가 그르다는 평을 말할수 있겠는가만은 그는 분명 광양군민의 존경받은 인물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념 갈등으로 인해 희생이 따랐다고는 하나 그 과정은 보면은 6.25 동난 중이라 재판을 못한다 해서 사형에 가까운 중죄라 취급 처형을 했다 하자, 그에 시신은 돌려주었어야 되지 않겠는가?

조선 오백년을 통하여 죽검의 최고 극치(惡辣)를 보여주었던 세조정난과 단종복위를 꿈꾸던 사육신들을 역적이라 하여 능지처참과 가문을 멸문지화를 시켰음에도 시신은 인계되어 숙종때 그들의 신원이 회복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지공원을 나라에서 관리하 고있는 것을 보면 우리 지역의 김완근 공의 사후(死後)처리는 모순이 있다.

그러나 그에 죽음이 현재까지는 사마천이 얘기하는 구우일모(九牛一毛)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태산과 같은 무거운 주검(敍勳)이 될 것으로 필자는 예상한다. 지난 과거사라 할지라도 이념의 갈등으로 고조된 빛바랜 옛이야기로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아쉬움이 서려 있다. 그러기에 어쩌면 그의 생(生)의 마무리가 가엽기 그지없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의 며느리는 시집와서 평생을 주안상 차리기에 시아버지의 잔정이 많이 배였던 터라 살아생전(2000초반) 소원이 당신 묘역에 나라에서 비석하나 세워주기를 바랬더라 하는데 필자 역시 그에 영혼이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으로 보아 하루속히 신원 회복이 되어 멸문지화 된 가문에 찬란한 빛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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