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학교를 파하고 어릴 적 달려갔던 동뜰 지나 동천 변은 생명으로 넘쳐나는 땅이었다. 벼 포기 사이사이에는 메뚜기•여치•풀무치•베짱이 등 수많은 풀벌레가 뛰놀았고, 깨끗한 바위 돌 사이, 맑은 물이 흐르던 동천은 징거미새우•미꾸라지•피라미 등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반나절을 같이 놀아 주었다. 밭 인근 타박 솔 산에는 꿩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마슬을 나서고, 억새 능선에서는 고라니가 뛰어놀았다.

나는 틈틈이 세계여행을 하고, TV 여행 프로를 보면서 외국의 광활한 푸른 초원과 끝없는 사막, 거대한 폭포와 눈이 시리게 맑고 푸른 호수를 보며 경탄했다. 일곱 가지 색깔이 스펙트럼처럼 빛나는 무지개 산들‘ 기암괴석의 바위산들과 웅장한 설산 등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롭고 신비한 풍광 앞에 내 눈을 의심한 적도 있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멀리서 바라보는 신비와 경이는 그저 보여줄 뿐 생명을 품는 땅은 아니었다. 우리의 금수강산은 신비와 놀라움은 주지 못하지만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을 품은 땅이라는 사실이다. 아마존이나 메콩강 주위 사람들이 강을 어머니의 신으로 섬기며 살고, 안데스나 텬산산맥 아래 사람들이 산을 아버지의 신으로 모시며 살아도, 우리는 사계절이 명확한 계절 탓일까 치우침이 없이 철쭉이 만발한 나지막한 뒷산을, 물안개 사이를 흘러가는 실개천과 자연이 품은 생명과 더불어 살았다. 어느 나라에서는 땅이 흔들리고 용암이 불을 뿜고 척박한 사막 길에서 하늘을 우러러 신에 절규하며 유토피아를 찾아 헤맬 때, 우리의 조상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집이 불 질러지고 도륙을 당하면서도 흙에 뿌리를 내린 잡초처럼 그저 묵묵히 이 땅을 지키며 오직 이웃과 더불어 살았다.

우리 조상들은 신화건 전설이건 민담이건 정직하고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은 끝맺음으로 연결 지으며 권선징악을 꿈꾸며 살았다. 맹수인 호랑이도 불편한 할머니를 등에 태우고 집으로 모셔다드리고, 괴물인 용도 베푸는 착한 사람에게는 보은으로 지켜준다, 상상하며 위로받았다. 부족함과 부당한 괴로움의 한에도 썩지 않고 정직과 선함으로 발효시켜 나름의 면역력을 길러냈다.

“생명보다도 예배가 중요하다”라는 일부 단체의 주장에 슬픔을 느낀다. 수많은 자영업자와 일용직들이 삶을 지키기 위해 고된 나날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기 때문이다. 종교의 필요성은 백번 공감한다. 그러나 인구증가율이 2분기 기준 0.84명으로 세계 최하위 수준이고 세계대비 한국 인구는 0.7%가 못된데 세계 50개 이상 대형교회 중 23개로 거의 반이 한국에 소재한다는 사실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일부 학자들은 교회가 독재정권과 보수언론의 한편이 되어 국민을 순화시키는 대가로 세금을 면제받고 세습도 용인받으며 성장해왔다 주장한다. “종교의 진정한 힘은 독선과 고집이 아니라 과학을 앞세운 자본주의의 오만함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겸손에 있다”는 말로 충고도 한다. 일본사람들의 주장 중 내가 유일하게 공감하는 부분은 개화기 ‘서양사람 들의 정신세계는 결코 본받을 것이 못 된다.’며 그리스도교를 배척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성경을 접하며 방황의 시간에서 벗어나 『참회록』을 쓰며 위대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 신비에 감격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을 꿈꾸며 성경 공부에 몰입한다. 그러나 공부에 매진할수록 성경의 언어적 유희를 실감하며 ”삼위일체를 이해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라며 모호함으로 백성을 굴복시키고 수탈한다며 비난하다 결국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회교도 51명을 살해한 뉴질랜드 남성은 법정의 준엄한 판결과 피해자 가족들의 오열 앞에서 끝까지 자기 신념의 정당성을 굽히지 않았다. 때로 신의 응답이라는 독백으로 신념은 배려와 상황 인식을 무력화시키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진리보다는 배척과 악으로 이분하며 적만을 만들어 내고 있다.

종교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이 품어온 기후풍토와 신화와 전설 민담, 환경에 적응해온 생활습관과 몸속에 쌓아온 DNA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식민시대를 거치며 선진국이라는 우월의식과 경제력 앞에 많은 미개발 국가들이 맹목적인 믿음에 휩싸이며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 서양인들이 천 년 이상 꿈꾸다 결코 체화시킬 수 없다 포기한 그리스도의 사랑 정신은 유일신이라는 오만함으로 포장하여 세계를 분쟁과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다. 오직 안정과 번식을 위해 구원을 기도한 인간은 낳고 길러준 자연을 무시하고 신비와 경애에 매달리며 실존적 삶을 소홀히 하다 이제 코로나와 기후재난의 어려움에 당면해있다.

괴테는 60년을 고치고 또 고쳐 쓰며 죽음의 순간까지도 미흡하다며 아쉬워한 역작『파우스트』에서 “이론은 모두 잿빛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라는 글을 남겼고,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의 머리 문장으로 인용했다. 넘치는 삶도, 미흡한 삶도, 오르고 내리는 고개이고, 돌아 흐르는 강물처럼 그 져 삶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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