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선생의 휘는 호일, 자는 관일, 호는 서운, 본관은 창원이다. 그는 백운산의 종봉인 억불봉에서 발원한 벽계수와 같은 맑은 물이 돌고 돌아 마을 앞을 흐르고 뒤로는 토끼재가 병풍처럼 길게 둘러싸인 병화불입지란 진상면 비촌마을에서 조선 말기 시국이 어지러웠던 대한제국 광무5년(1901.11.14.~1983.9.17.) 부 종현, 모 양천 허씨의 6남매(3남 3여)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조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5년 서울 경성중동학원 2년을 수료함으로써 일찍이 개화(開化)문물을 접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랐다.

선생의 집안은 1530년경 창원황씨 후헌이 입향 해 오백여년 가까이 황씨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그런 가운데 황 씨 일가족 중흥기로는 하석의 아버지인 청계당 면기 때부터 아래로는 본인에 이르기까지 5대를 적선과 독립운동, 육영사업에 큰 족적을 남겨 광양에서는 유례가 없는 집안이다.

그의 고조는 휘는 면기요, 호는 청계당이다. 순조7년(1807) 식년시에 생원시 장원(일등)을 했다. 평안도 홍경래난에도 의병을 소집해 공을 세워 가문의 바탕을 공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청계공가훈10조를 제정해 후손들에게 실행토록했다. 그랬기에 훗날 그에 묘지에 충의와 절개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조선거유 마지막 선비 면암 최익현이 비문(행적)을 썼으며, 현손인 호일 선생이 고조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청계당을 지은 것이 군지와 시지에도 기록이 돼 있고 지금도 서운 선생의 장손인 상보(1953. 중학교 20회)씨가 관리하고 있다.

증조의 휘자는 하석이며 호는 운고다. 그는 흉년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준 선행이 소문이 나면서 만인덕적인이 광양에서 나왔다는 적선 얘기가 서울장안에 펴지면서, 당시에 한양에서 특사가 과객으로 위장을 해 현지확인 후 남대문에 ‘광양에 만인적덕 황하석이 났네’라는 방(榜)을 붙였다는 얘기가 있다.

또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조정의 명에 의해 정려를 받아 진상 죽림마을에 그의 정려비가 세워져 있다.

그 정려문(旌閭門) 이름은 ‘백원문(百源門)’이며 정면에서 보는 정려비문(旌閭碑文)은 ‘효자성균진사황하석지려(孝子成均進士黃賀錫之閭)’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좌측으로는 자그마하게 ‘上之二年辛亥三月 日命旌<고종2년(1865)3월임금(조정)의정려명>’이라고 새겨져 있다.

백원(정려)문은 중국주나라 문왕이 이야기한 “효는 백행지본이다” 즉 일백행실의 근본이다는 취지에 글로 존경의 정려비문이 아닐 수 없다.

조부 병욱은 1860년 비촌에서 태어나 한학을 위주로 면학에 힘써 탁지부(현 재경부)산하 전라남도주재 영광군 세무관 재임 시 국고를 모아 선편(船便)으로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했다.

자기의 역량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음덕을 등에 업고 서울 운양대감댁과 우당 이회영 선생댁을 자주 드나들며 한양에 인맥을 깔면서 마당발이 되는 사이 경술국치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만주 북간도로 갔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한약방을 개업해 성업이 되어 1915년에 비촌에 있던 전 가족을 만주로 합류시켜 생활하면서 근방에서 독립군들의 군자금을 지원하다 1924년에 돌아가셨다.

선친 종현 역시 비촌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만주에 있다가 귀국해 광양집에 와있던 중 당시 피폐해 있던 광양향교를 일으켜야 한다는 유림들의 건의로 초대직원(현 전교1910~14)을 지내면서 초석을 다듬었다. 1915년 부친의 연락을 받고 전 가족이 다시 만주로 합류해 생활하다 1926년에 44세 일기로 돌아가셨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