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430호에 이어
서운 선생의 일대기를 보면 선생은 청소년기를 진상 비촌에서 성장하면서 서울 경성중동학원 2년을 수료하고 16세 때에 할머니를 따라 북간도 용정에서 가족과 합류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3년 후 귀국해 다음 해 봄에 광양읍 마산마을 경주정씨와 결혼한 후 26세 때에 큰아들 하운을 보았다.


그런 사이 만주 연변에 계시던 조부께서 1924년에 돌아가셨으며 2년 후에 아버지도 운명하셨다. 당시 26세였던 그는 비보를 듣자마자 서둘러 간 것이 5일 만에 북간도에서 도착,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골과 시체를 고향으로 모셔와야겠다는 굳은 의지로 정신무장을 해 이국땅에서 수륙만리(水陸萬里) 대장정을 실행에 옮긴다.


먼저 아연철판관 2개를 제작해 위에는 할아버지의 유골을, 아래는 아버지의 시신을 담아 이동하기 편하게 해 마차와 화물차를 이용하여 며칠에 걸쳐 청진항까지 나와서 서해를 건너 원산까지 배로 이동해 경원선 기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했으며, 서울에서 다시 경부선을 이용해 부산으로, 부산에서 진주로 이동했다.


진주에서 화물자동차를 이용 하동에 도착하니 하동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가운데 미리 만들어온 상여로 비촌마을 까지 운구를 해 20여년 만에 시신으로 고향 산천에 환국했다. 서울, 진주, 하동에서 로제(路祭)모실 땐 많은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한다.


이러한 과정을 볼 때 충과 효가 그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었기에 효행이 이뤄졌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조선 사회에서 백성의 최고의 덕목을 효에 두었다 할 지라로 아무나 효를 행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 운고 황하석님 정려비

이처럼 비용도 비용이지만 더구나 일제 치하에서 차디찬 2월의 엄동에 국경을 넘고 서해를 건너 천리가 넘는 고향을 찾아 모신다는 것이 일반인은 감이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무한한 효성이다.


한편으로 그는 중국 연변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때의 기억으로 고향에 와서 주물공장사업이 잘돼 여유가 있어 진상면 비평 마을에다 사립 단군학원을 창설 선인간 후지식이란 명제 아래 인재양성에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47년 8월 지방유지 서희수 외 7명이 집으로 찾아와 중학교설립을 요청했다.
이에 선생은 부지와 건축자재, 인건비 등을 언약하고 논 200두락(2만평)을 설립자금으로 출자했다.


이러한 선생의 고귀한 건학정신을 받들어 공학 참 배움의 길을 닦아 중학교는 일만칠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그들이 경향각지에서 훌륭한 일꾼이 돼 모교의 이름을 빛내고 있음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학교 제8회 졸업생으로 광양시장 3선을 지낸 이성웅 동문은 서운 황호일 선생 현창사업 추모식 추모사에서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한 광양 동부지역 젊은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꿀 수 있도록 배움의 길을 열어주신 서운 황호일 선생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이 말은 생각해보면 본인이 서운에 대한 존경의 표시도 되겠지만 일만칠천여 동문들이 서운 선생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대신 전해 준 것으로도 이해가 된다.


또한 당시 노산 이은상 선생이 이 학교 사적비문과 교가(작사)를 짓는데 교가 한 구절을 보면“백운산 구름 속에 높이 솟았고/수어천 끊임없이 흘러내린 곳/강산도 아름답다 정든 내 고장/새 일꾼 자라나는 진상중학교...”라 했는데. ‘자라나는 새 일꾼’ 즉 학생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1950~60년대 졸업생들은 이 학교가 아니었더라면 90%는 진학을 못 했을 것으로 예측해본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학생이 서운 선생에게 은혜를 입었는가.


그는 지역선각자로 존경의 대상이기에 광양시에서는 조례에 근거 광양시 역사인물 제2호로 등재됐다.


그러기에 오늘도 학교 중심을 지키고 운동장을 내려보며 서 있는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교육이념(선인간 후지식)은 천추에 길이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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