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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철  |  hwakae72@gyci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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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26  15: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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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이제 뼛속까지 쑤시고 아픈 늙은 한 여자가
허덕허덕 청소하다 말고 창문 밖으로
온통 샛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망연히 바라보고 섰네
짙은 회색빛 암울한 하늘을 배후로
마지막 불꽃처럼 환하게 타오른다
문득 떨어지는
깊은 한숨 소리 같은
샛노란 은행잎들
골다공증의 50대 여자의 뼛속에서
그녀의 뼈
그녀의 한 생애가 흐물흐물 녹 게 다 보이네
감정도 눈물도 다 말라붙어
더 이상 울지도 못하는 나이
나는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가?
깊은 회한의 죄 없는 몸뚱어리에
오롯이 남겨지는 한 생애의 흔적뿐
소리 없이 잦아지네
뼛속까지 절절히 사무치는 삶

※시인 양정자
- 1944년 서울 출생
- 1990년 첫시집 <아내일기> 출간
- 시집 <아이들의 풀잎노래> 외

지난밤 우리가/미친 짐승처럼 얼크러져/부끄러운 살의 장작불을 활활 태운 그 이튿날/그대는 갑자기/안면 싹 바꾸려 한다/밥상에 반찬 시원치 않다/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졌다/용돈이 너무 적다는 둥/목소리도 당당하게 위엄 떤다/지난 밤 흠씬 짓눌리고 짓뭉개진/ 행복해진 그대 마누라/다시 한번 정신나게 짓밟으려 한다/그지없이 가련하고 귀엽도다/내 하나뿐인 사내 그대여/내 겉으로는 그럴 때, 그대/가장 위대한 사내로 여겨주리라 <시 ‘위대한 남편’ 전문>

양정자 시인은 그 생을 교단에 헌신했다.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와 어머니이면서 주부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소소한 일상의것들을 내내 그려낸다. ‘위대한 남편’ 역시 그러하다. 변덕이 죽 끓듯 밤과 아침의 얼굴이 사뭇 다른 남편의 모습을 저리 곰살맞거나 혹은 익살스럽게 차려내는 힘을 가졌다.

시집 <가장 쓸쓸한 일> 속에 들어있는, 시의 뼈마디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시어들은 모두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언어다. 부려 창고에 쌓인 먼지 나는 언어를 버리고 일상의 대화를 시어로 전이시키는 빼어난 솜씨를 읽어내는 맛이 이만저만하지 아니하다.

이른바 일상적 풍경의 시적 전이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생활과 동떨어진 언어가 아니어도 이처럼 넉넉한 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할 정도다. 양정자 시인의 남편은 소설가다. 이름은 현기영,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먹먹하게 그려냈던 <순이 삼촌>을 쓴 이가 바로 그 현기영이다. 그러나 한국 문단의 밭을 기름지게 한 위대한 소설가이자 참여정부 시절 한국문예진흥원 원장을 지낸 남편 현기영이라는 이름으로도 시인 양정자를 결코 가릴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가 박완서 역시 “양정자 시인의 시는 나를 슬그머니 매료시켰다. 아!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는 거로구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건강한 이 여편네 시인이 즐겨 다루는 건 빨래, 연탄구멍, 발 고린내, 무말랭이, 못 나고 위대한 남편 등 아주 구질구질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며 시인이 가진 내공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을 것이다.

시 <늦가을>은 그런 일상 속을 유유히 살아왔던 60대 여자의 넋두리가 잘 녹아 오히려 아프다. 누군가를 가르치던 일과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왔던 세월, 그리고 누군가의 어머니로 견뎌왔던 그 모든 세월의 가진 억겁 같은 무게를 조용히 벗고 여전히 일상을 살고있는 늙은 자신에 대한 관조는 그래서 쓸쓸할 일이다.


몸에 짙게 밴 습관에 이끌려 청소를 하다 말고 불현 듯 바라본창문 너머 세상엔 이미 가을이 몸을 벗고 떠나는 중인데 은행나무와 이별을 고하는 낙엽과 그 자신의 삶 역시 늦가을을 지나 겨울로가고 있음을 직감한 초래의 여자가 조용히 사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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