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수원이 섬진강 오백여리의 비경을 담아 굽이굽이 흘러 끝자락인 망덕포구를 지나 남해와 만나는 곳.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광양만권의 축이었던 태인도는 삼봉산의 삼신기를받아 인물이 많이 배출한 옛날 섬 지역이다.

그러나 지금은 광양제철소와 연관단지 조성으로 상전벽해가 되어 여기저기 동서남북으로 다리가 놓여 섬이란 이미지가 사라졌다.

여기에 삼봉산이라고 부르는 산은 풍수가들이 낙지형국이라 전한다. 상봉(삼봉산)을 중심으로 좌청룡우백호 즉 상짓. 군두리. 연목. 새터끝. 청룡끝. 길마재. 인대목. 섬뒷등. 등성이 외 8개 멧발이 바로 낙지발 8개에 해당한다는 것.

이 섬에 첫발을 내디딘 이는 달성서씨이며, 두번째로는 이 섬에 발을 디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암에서 입향(도)한 해은 김여익공이다.

공의 휘는 여익, 자는 여행, 호는 해은, 본은 김해로 부(父)김식은 진무원종공신에 녹훈되어 증직이 호조참의이며 모는 정부인 나주나씨와의 사이에서 1606년 8월 1일 전남 영암 구음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는 1624년 이괄의 난에 평정하려 김완 장군을 따라 종군했다가 순절했다. 그 후 공은 세월이 흐른 후 병자호란 당시에 삼종형 김여준의 뒤를 따라 참여했다가 1637년 1월 30일 화의(인조의降伏)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물러나 그는 영암군 서호면 고향을 떠나 새 삶의 보금자리 찾아 정착한 곳이 태인도다.

김해김씨 사군파 집안으로는 김여익(1606-1660)공이 1640년경에 처음 입향해 은둔하면서갈매기와 벗하여 시식해의(始殖海衣)를 처음으로 양식했던 분으로 훗날 그 후손들이 비문을 세우고 김시식지라는 시배지(始培地)로 태인도와 광양김을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광양김시식지는 전라남도 기념물113호(1987.6.1.)로 지정됐다. 문화재로 지정된 주요근거자료는 1714년 2월 하순 당시 광양현감 허심이 쓴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지의금부사김공 묘표(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知義禁府使金公 墓表)”이다.

묘표 내용중 마지막에 이와 관련된 구절을 번역하면 “어느날 김시봉 군이 가장(家將:집안 조상의 행적)을 가지고 나를 방문하여 그 증조부 김여익의 묘표(墓表: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 글을 써달라고 요청하여 나는 사양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진실한 옛습이 있는 것이 보이고 그것은 또한 유교(遺敎:유훈과 같은 말로 죽은 사람이 남긴 가르침)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였다.

<후일 세상을 논이하는 사람도 역시 김여익공에게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갑오(1714)년 이월 하순 광양지현 허심 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만고의 명필이요 명문장이라고 칭하는 왕희지 난정기 끝부분에도 보면 “...후지람자 역장유감어사문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후세에 이글을 살펴보는 사람도 이글에 대한 감회(느낌)가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광양현감 역시 이묘표문 마즈막에 “後之論世 亦將有感於斯公也 :후일 세상을 논의하는 사람도 역시 김여익공에게 느끼는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이 쓰는 글의 소재가 유사하다고는 하나 마지막 맺음하는 글이 어찌 똑같이 썼을까 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세태가 바뀌어도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인심(人心)은 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필자 역시 그들과 공감하는 바다.

공의 증손인 김시봉(1690년생)이 현감에게 부탁해 지은 묘표비(墓表碑)는 어느 땐가 사라져 없었는데 후일 옥곡면수와 다압면수를 지낸 여익공의 5대손 김태혁(1811년생)공이 생전소장하고 있던 비문 원본이 발견돼 조상의 행적이 밝혀짐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 이를 계기로 공의 업적을 기리는 영모재를 당년(1919)에 건립했다.

이후 1980년 9월 15일자로 사단법인 김여익공 유적보존위원회가 전남도로부터 비영리허가를받아 뒤이어 1987년 6월 1일 문화재로 지정을 받자 이후부터는 문중의 틀에서 벗어나 당국과 협의해 진행됐다.

그래서 영모재는 현재 광양김시식지의 구심점이며 매년 음력 시월 십 일 종중에서 시제를 모시고 있다.

이로 인해 1919년에 영모재와 출입문 삼문(해은문:海隱 공의號)을 세운 후 본사당에 따른 건물 연대순을 보면 1991년 2월 27일 세운 김시식유물전시관은 영모재 뒷편으로 부지 147평에 건평 11평으로 건립했으며 같은 해에 인호(인호: 태인의 옛이름)사 사적비를 영모재 경내에 세웠다.

이어서 1994년에 유물전시관 뒤편에 부지 82평에 건평 13평의 인호사를 세워 공의 위패와 묘표문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1999년 용지마을 앞에 세운 김시식지 유래비는 공이 처음 김을 양식했던 애기섬에 속했던 곳으로 도로변에 세워져있다.

공이 이 섬으로 들어와 시식해의를 처음으로 양식하며 오랜 세월과 함께 뿌리를 내린 지가 어언 400여 년이 흘러 광양 관내 300여 가구 후손들이 저마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공의 후손들 역시 명문 집안으로 우리 광양을 빛낸 인사를 보면, 독립투사 김상환(1909, 1929.11.3. 광주학생운동 때 학생들 지휘 주동, 징역 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비롯 김보현(1924, 전남지사, 체신부장관, 농림부장관) 김재호(1930,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재선), 김주현(1950, 행정자치부 차관), 김옥현(1934, 광양시장 재선), 김재무(1960, 전남도의회 의장) 뿐만 아니라, 시지(2005)에 근거하면 30여명이 마을 출신 인물난에 등록된 것으로 보아 다양한 분야에 다수의 인사가 배출됐다.

오직 김여익공이 삼봉산의 삼신의 기를 받아 후손들에게 전하여 많은 인사가 배출한 것으로 보아 그 후손들은 공이 쌓은 음덕과 숭고한 정신을 길이 계승하여 종사(宗事)와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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