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규 광양YMCA 이사장

“교사라는 평생의 꿈 해직으로 무너졌지만
묵묵히 아이들 곁 지키 며 살아온 36년의 삶”

숨 가쁘게 앞만 보며 달리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서야 문득 뒤돌아오면 열정 혹은 분노, 혹은 희망을 덧댔던 청춘은 까마득하다. 백운산 물빛처럼 맑고 솔잎처럼 푸르던 청춘은 멀어져 눈에 잡히지 않는 시대와 시절의 손을 잡고 떠났음이다.

그래도 서릿발처럼 맺혔던 붉은 분노가 걷히고 순하디순한 할아버지 눈빛을 가진 얼굴이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 흔흔한 안개와 바람 살랑거리는 대숲을 헤치고 생의 뒤안길을 자박자박 걸어가야 하는 길을 마주한다. 참 얄궂기 그지없는 인생이라는 놈이다.

1976년 전남 완도군 한 섬에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아이들의 웃음에 섞여 살았던 청년은 이제 환갑 진갑을 다 넘었다. 그 사이 몇 차례 폭풍이 휩쓸다 지났다. 왜 햇볕 짱짱한 맑은 날 또한 없었으랴. 가끔 비 오고 시원한 바람도 불었다. 혹은 더웠으며 그리고 길게 추웠다. 그래도 아이들의 곁에 묵묵히 지켜내는 운명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게 그의 자리였다.

청년교사 박두규는 완도 섬마을 학교에서 5년하고도 6개월을 근무했다. 아이들의 눈은 순했고 투박했으나 그런 아이들이 더없이 좋았다.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웃고 울면서 평생 살 줄 알았다. 한편으론 전남교원연구대회에서 ‘국사 교육’ 연구 논문을 제출해 두 차례 입상할 만큼 교육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학교의 현장학습 개선이 시급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을 기점으로 민주화 운동이 서서히 불타오르던 80년대 중반 자신의 탯줄을 묻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모교이기도 한 진상고등학교와 광양고등학교에서 후배이기도 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여전히 광양에서 살고 있는 그의 제자들은 그를 엄했던 스승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시대를 읽는 길을 열어준 스승이기도 했다.

돌아온 고향, 광양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7년 6개월을 보냈다. 적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렇게 고향 땅엔 제자들이 늘었는데 아이들의 바른 언행을 이끄는 학생 생활지도에 열정을 쏟았다. 당시엔 자취나 하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 야간지도 역시 그의 몫이었다. 힘들었지만 보람이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1987년 6월은 그의 인생에도 격랑이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활화산처럼 분출되기 시작한 그해 6월 그 역시 그 항쟁 속에 있었다. 그리고 1989년 조직됐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광양지회장을 맡으면서 교육의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가 해직됐다. 잠시 길이 끊겼다.

그리고 다시 교편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한 번도 교육 현장을 떠난 적은 없었다. 예고되지 않았던 해직교사라는 신분으로 고달픈 교육운동과 지역운동을 해나갔고 잘못된 교육제도 개선을 위해 직접 전남도 교육위원 선거에 나가 당선돼 4년간 예산 회계 질서 바로잡기, 공정한 인사 행정의 제도화, 지역교육청과 학교 현장으로 예산 지원 확대, 학교 시설의 현대화 등을 추진했다.

“내 고향 광양, 교육과 문화가 맑게 흐르는 향기로운 도시로 거듭나길”

시대를 추슬러 생각해 보면 마지막 직장인 국립청소년우주센터 원장에 이르기까지 35여년 동안 줄곧 학교와 교육기관, 그리고 청소년 인권단체를 오가며 살아왔다. 비록 교단에 다시 서진 못했으나 아이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삶이었다.

특히 이사장을 맡으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광양YMCA는 그가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 조직된 지역 내 대표적인 청소년단체다. 이를 위해 교사복직을 미뤘고 1996년 3월부터 사무총장을 맡아 청소년과 시민사회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광양시 청소년상담복지센터장, 광양YMCA 백운글방 개설 등 학교 밖 청소년과 성인들을 위한 검정고시반도 그가 땀을 쏟은 일 가운데 하나다.

전남도 산하 기관인 ‘전라남도 청소년미래재단 원장, 고흥군 나로도에 위치한 국립청소년우주센터 원장을 맡아 청소년 수련활동의 영역을 전국적으로 드높이는 등 아이들과의 동행을 멈추지 않았다. 교단에선 쫓겨났지만 아이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그에게 전남도는 지난해 전남교육상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상을 손에 꼭 쥐어줬다. 내내 무거웠던 그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지난해 11월 국립청소년우주센터 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봉강면 당저마을에 터를 잡고 다시 고향에서의 삶을 사는 중이다. 물론 돌아온 직후 광양YMCA 이사장을 덜컥 떠안았으니 아이들과의 인연을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요즘 공을 들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땅속에 파묻힌 지역문화와 전통을 되살리는 일이다. 기어이 광양문화연구회장까지 맡았다. 그리고 올해 길 위의 인문학 사업에 선정됐으니 일복이 많다고밖에 달리 무엇으로 표현하랴.

29일 길 위에 인문학 성과발표 성격인 ’전통문화영상으로 만들기‘ 스마트폰 사진전 행사장에서 만난 박두규 이사장은 “더 이상 일을 맡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나 교육문화는 내 남은 과제다. 광양이 교육문화도시로 한 걸음 더 나가도록 하는 게 평생의 꿈”이라며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비해 많은 것들이 채워졌으나 문화영역의 중심인 사람이 없다. 문화전문가를 키우고 이를 시민사회와 소통하도록 돕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교육은 키우는 것이지만 문화는 전문가 육성과 시민사회가 함께 성장해야 그 폭이 넓어지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이라며 “사람이 모자라는 분야에는 사람을 키워낼 수 있도록 힘을 쏟겠다. 특히 도시재생과 문화도시와 맞물려 활동공간을 마련하고 자발적인 시민참여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데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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