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 사료조사위원

오백여리의 비경을 담아 도도히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파아란 하늘과 같은 푸른물이 출렁이는 넓은 뱃사장을 안전(案前)으로, 뒤로는 백운산기슭의 쫓비산 능선이 감아 안은 듯한 포근함과 동구 밖 수월정이 마을의 안전감과 위상을 더해주는 산수(山水)를 접한 광양의 유명한 섬진매화마을이다.

이곳에서 조선조 고종말기 서부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힘들었던 시절 대한제국 6(1902)년11월에 김용순의 아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김오천 선생은 본은 김해로 절효공 극기의 십칠대손이다.

그는 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8살에 고용살이를 시작해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고용살이의 품삯으로 여비를 마련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굳은 각오와 의지로 광부 생활 13년을 하는 동안 어렸을 때 기억의 끈을 놓지 않고 늘 “사람은 사람을 속이나 흙과 나무는 속이지를 않는다”는 진리를 각인, 나도 언젠가는 농장을 가져봐야겠다는 자기만의 포부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나이 서른이 되어 고국에 돌아올 때 그는 아무나 할 수 없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13여 년 동안 이국에서 피눈물 나게 모은 돈으로 밤나무와 매화나무 각 5천주씩을 사와 마을 뒷산에 심어 재배했다.

다시 3년 후에 일본 복강현 어느 농장으로 들어가 10여년에 걸쳐 밤나무 재배기술을 배워 고향으로 돌아와 육묘 접목에 심혈을 기울이며 주위에도 접목기술을 파급을 시켰다.

덕분에 광양 지역에서는 관리할 수 있는 경사지의 산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밤나무를 심어 1960~70년대 농가소득으로 보릿고개를 면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됐다.

본인의 밤나무산 100여 정보를 비롯해 주위 마을과 인근 진상, 진월, 옥곡면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광양군 전체를, 더 나가서는 인근 순천, 구례, 곡성, 경상남도 하동, 남해를 넘어 전국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그런 가운데 10여년에 걸쳐 매년 20만본을 각도 임업시험장을 통해 본묘목을 다압1호에서 다압5호까지 품종명을 지어 공급했다.

그는 오직 근면과 성실, 정직을 생활신조로 영농에 종사를 하다 보니 사계(斯界:계통)에 지도자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관(官)에 포상이 답지(沓至)하여 대통령, 농림수산부장관 표창장과 산업훈장까지 받았다. 뿐만아니라 율림(栗林)의 선구자로 나이 칠십이 이르다보니 그에 혜택을 입은 이들이 그를 공경해 율산(栗山)이란 아호까지 지어 바치고 그가 사는 마을 입구에다가 비(碑)를 세워 그의 업적을 높이 찬양했다.

그 비문 마지막 구절을 보면

“...학구(學究)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에 묵묵히 종사하여 이용후생의 대도(大道)에 커다란 도움을 끼친 것은 실(實)로 애국적인 행위임이 틀림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이 또 이밤메(산)밑에 밤할아버지의 업적을 새긴 빗돌이 세워지지 않을 수 없는 감(敢)이다. 서기 1972.11. 문학박사 인민 이가원은 글을 쓰고, 광양향교 소원 주정수는 글을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문으로 알 수 있듯이 광양은 약 70%가 산지로 형성돼있어 산간벽지에서는 광양제철이 들어서기까지는 그야말로 가난과 배고픔을 달래야 했던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이후 율산선생의 밤이 들어오면서부터는 산지에는 빼꼼한 데라곤 없이 밤나무를 심어 자식들의 교육비를 비롯 가계에 크나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 무렵 밤 소득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밤나무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닌다는 얘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밤나무가 광양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양시의회 부의장을 지낸 다압출신 정현완 씨의 얘기에 의하면 본인도 당시 밤나무 장학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중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1960-70년대 다압면에서 섬진마을이 제일 궁핍하고 가난한 마을로 보잘것없는 무촌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밤과 매실로 인해 전국에서 으뜸으로 잘사는 마을로 뒤바꿔 놓은 이가 율산 선생이요, 그의 며느리인 홍쌍리 여사라 했다.

이처럼 이 지역주민들의 생활에 부(富)를 창출할 수 있도록 그 길을 닦아 줌으로 인해 광양을 비롯 전국농촌 경제에 이바지한 공이 지대하였기에 그의 나이 70(1972)세에 이르자 지역주민과 나라에서 그의 마을 입구에 율산공원이라는 이름 아래 동산을 만들어 ‘율산김오천송적비’라는 비문을 세워드렸다.

그 비문 좌대 전면에는 농수산부장관 김보현을 비롯 산림청장 강봉수, 전라남도지사 김재식, 광양군수 김홍영, 광양경찰서장, 광양교육장, 지역주민의 이름이 새겨졌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과연 이 지역의 선구자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사로 조명해보며, 나아가 때가 되면 광양시 조례에 의한 광양역사 인물로 등재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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