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원 광양여자 중학교 2학년

▲ 최혜원 광양여자 중학교 2학년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란 영화에는 주인공 브루노의 엄마가 미친 듯이 웃으며 그네를 타는 장면이 있다. 엄마는 자신의 아이들이 유대인수용소와 가까이 사는 것을 꺼려했고 유대인들과 마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용소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태우는 연기라는 것을 알고는 남편에게 적대감을 느끼며 갈등하며 대립한다. 엄마가 웃으며 그네를 타는 모습이 행복이 아닌 절망에 가까운 슬픔에 더 가까워 보였고 그걸 지켜보는 브루노의 아빠는 가족들을 다시 베를린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에 열을 올렸던 당시의 영화인데 브루노네 가족이 유대인수용소 근처로 이사 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브루노는 탐험을 하며 노는 도중 수용소에 갇혀있는 자신과 동갑인 슈무엘을 만난다. 자신의 집에 온 슈무엘을 외면한 게 미안했던 슈무엘은 그 친구의 아빠를 함께 찾아주기로 약속하고 수용소 안에 들어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여러 유대인들과 함께 갇혀 독가스에 의해 살해당한다.

주인공인 브루노는 유대인 학살, 독일 정치 상황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맑은 아이였다. 처음에 부모님이 유대인은 인간도 아니며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때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저 파자마를 입은 농부라고 생각했다. 또한 처음 보는 곳인 유대인수용소에 친구 아빠 찾는 것을 도와주려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브루노는 순수하고 자율적인 삶을 산다. 하지만 그의 누나 그레텔은 달랐다. 많은 사람과 매체를 접하면서 변해갔고 비판의식 없이 내면적으로 다 받아들였다. 영화 후반부에는 거칠고 주입식 교육에 세뇌되어버린 그레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유대인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 코틀러 중위가 유대인인 파벨을 죽일 듯이 때리는 장면이 있다. 파벨이 코틀러 중위에게 와인을 실수로 쏟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의 행동은 너무 과했다. 유대인은 그 당시 조금의 실수로도 독일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유대인들은 독일인과 비슷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한 영토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유대인들이 현재 국가를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은 그들의 선조 때부터 내려온 땅이고 그 근거는 구약성서에 쓰여 있다며 당당히 차지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게 당했던 무자비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듯이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행위를 번연히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픔은 반복이 아니라 추모하고 화해하며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 선생님,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옳은 행동을 하는 때가 있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명령, 지시 등의 따르는 것을 타율적인 행동이라고 한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도 타율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을 볼 수 있다. 바로 브루노의 누나 그레텔이다. 그레텔은 가정교사인 리스트나 코틀러 중위를 따라 행동하고 나치와 관련된 선전물을 접하면서 변해간다. 하지만 타율적인 행동에는 문제점들이 있다. 보상이나 처벌이 없으면 지속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기 어렵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므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타율적으로 행동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율과 책임을 토대로,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하며 선한 행동을 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고, 양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다수를 위한 강제된 행위라 하더라도 잘못된 일이라면 강하게 부정해야 진정으로 서를 존중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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