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제국주의는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항복을 예견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조선인은 갑작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해방은 조선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단순한 의미 이상을 지녔다.

해방은 어떠한 수준과 성격으로 이루어진 것인가를 면밀하게 분석해야 하는 것이었고, 새로운 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와 결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명확한 구상을 가졌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들과 난관들도 많았다.

▲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사무실을 뒀던 광양군청
새로운 국가 건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결성으로 첫 걸음을 내딛었다. 건준의 결성은 해방을 예견했던 이들이 구상했던 구체적 산물이었다. 비단 건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전국 곳곳에서 식민지 권력을 대체할 새로운 자치기구들이 속속 건설되고 있었다. 이들은 머지않아 건준의 산하 기구들로 편재됐다. 그리고 미군정이 상륙하기 이전에 남조선 지역에는 145개의 건준 지부가 결성됐다.

광복 직후 열린 ‘해방축하 광양군민대회’
광양에서는 8월 15일 오후에 첫 모임이 개최됐다.
광양경찰서 무덕정(武德亭)에서 개최됐던 ʻ시국수습군민회의ʼ가 그것. 이 모임을 주도했던 사람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었다.

당시 그는 광양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해방 직전에는 경찰서에 수감돼 있었다고 한다. 우파가 주도해 이 모임이 개최됐다면, 좌파가 주도한 모임은 8월 16일에 있었다. 즉 광양읍 내의 항일독립운동가 김완근(金完根)의 집에 김기선・박봉두(朴鳳斗)・정진무(鄭晋武)・정순화(鄭順和)・이경호 등 12명의 인사들이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이들은 해방 직후 발생할 수 있는 치안과 행정의 공백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참석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치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자치위원회는 위원장에 김완근, 부위원장에 정진무와 이은상을 선임하고, 상임위원 24명을 구성하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모임을 마친 후,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부위원장에 내정된 이은상의 승낙을 받기 위해 김기선・박봉두・이정호가 그의 집을 방문했다. 이은상은 이들의 제안에 대해 몇 가지 수정을 한 뒤 받아들였다.

8월 17일 광양서국민학교에서는 ʻ해방축하광양군민대회ʼ가 열렸다. 해방이 되었을 때, 마을 단위로 만세행진이 있었기도 했지만, 이 집회는 해방 이후 조선인이 주도해 광양에서 개최했던 첫 군중대회로 알려져 있다. 이날 행사에는 수천 명의 광양군민이 참석했는데, 정순화의 사회로 진행됐다.

군민대회를 개최했던 주요 목적은 김완근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서의 담당자와 상임위원 22명을 공식적으로 선임한 광양자치위원회가 군민들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함이다. 자치위원회에는 좌우가 망라돼 참여했으나, 일제강점기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진영이 다소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군민대회를 마친 후, 참석자들은 화신광장(和信廣場)까지 시가행진을 벌렸다. 참석자들의 일부는 대회를 마친 후에 일제강점기에서 군수를 지냈던 김상수의 집을 습격해 분을 달랬다. 한편 이러한 흐름과 달리, 8월 16일에 김석주・박순갑・정창옥 등이 일본과 협상해 광양경찰서의 무기 일부를 인계받고 ʻ치안대ʼ의 활동을 전개했다.

자치위원회는 광양읍사무소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8월 20일 자치위원회는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에 따라 건준으로부터 통첩을 받고 ʻ광양건국준비위원회(광양건준)ʼ로 개칭했다. 광양건준의 주요 활동은 일본인들로부터 행정기관을 접수하는 것과 각 면(面)에 건준 지부를 결성하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광양건준의 활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활발했다.

광양인민위원회와 미군정의 갈등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미군은 38도선 이남에 진주하면서 군정을 설치했다. 그리고 미군정은 각 지방에 전술군을 파견했다. 미군정은 미군 진주에 앞서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던 인민공화국과 각지의 인민위원회를 부인했다. 미군정의 전술군이 광양에 도착하기 이전에 광양건준은 광양인민위원회로 개편되어 있었다.

개편이 이루어진 날짜는 명확하지 않지만, 9월 6일 박봉두와 정용재가 인민공화국 발족식에 참석한 직후였다고 한다.

한편 전라남도 인민위원회는 중앙 건준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날 보다 3일 후인 10월 10일에 출범했는데, 박봉두와 정용재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광양인민위원회로의 개편은 전라남도 인민위원회의 간부가 광양건준 위원장 김완근을 만난 다음, 위원장의 발의로 이뤄졌다.

인민위원회로의 개편 과정에서 우파 성향의 이은상・김석주・이달주・정창욱이 탈퇴했고, 이들을 대신해 정용재・배도열・박경래・하태호・김용주・박수봉 등이 새로운 위원으로 충원됐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정 69군정 중대는 10월 27일 순천에 도착했다. 이들은 11월 5일에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순천에 본부를 설치한 69군정 중대는 순천 뿐 아니라 광양, 구례, 곡성 그리고 여수 등지를 관할했다.

미군정 69군정 중대는 광양의 인민위원회를 한 동안 인정했으나, 점차 불법화시켰다. 이에 따라 미군정과 광양인민위원회의 관계는 점차 악화됐다.

그리고 1945년 12월 30일 광양인민위원회의 주최로 화신광장에서 개최된 ʻ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대회ʼ는 변곡점을 맞는다. 마침내 1946년 1월 미군정은 김완근과 정순화를 불법 적산관리혐의와 공공기물 불법유용혐의로 구속해 순천검찰청에 송치했다.

이후 광양인민위원회는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개편 활동했으나, 이전에 비해 활동력이 약화됐다. 광양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완근은 이후에 전라남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새로운 국가의 성격과 주체를 둘러싼 갈등은 자료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지만, 지속되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은 1947년 5월 1일 광양군 옥곡면 옥곡지서 부근에서 개최됐던 메이데이 행사였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 행사에는 1천여 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경찰은 해산을 명령했으나, 군중들은 이를 거부하고 시위를 계속했다. 결국 경찰의 발포로 신금리 마을 주민 서승식을 비롯해 총 3명이 사망했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여순사건 격전지, 광양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여 뒤인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시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에서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4.3사건 이후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는 제14연대 내 좌익계 하사관들이 주도해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전남 동부지역으로 신속하게 확산됐다.

▲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의 집단 희생 장소로 추정되는 검단재
여수에 이어 10월 20일에 순천을 장악한 반군은 3개의 부대들로 재편됐다. 김지회(金智會,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 출신, 제14연대 중대장)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남원을 향해 북쪽으로, 일부는 보성·벌교 방면으로, 그 나머지는 광양을 향했다.

제14연대의 봉기가 발생하자 정부는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같은 달 21일 육군총사령부는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하고, 토벌사령관으로 송호성 준장을 임명했다. 정부는 당시 15개 연대의 약 2만5천명의 육군병력 가운데 38선을 방어하는 8개 연대를 제외하고 7개 연대에 총 12개 대대병력을 진압군으로 투입했다.

진압군에 맞선 반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광양의 경찰들은 10월 20일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순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은 반군의 기습을 받아 3∼4명의 희생자를 내고 돌아와야 했다. 광양으로 돌아온 경찰은 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좌익 혐의자들을 덕례리 주령마을 인근 반송재로 데려가 총살시키고 후퇴했다.

반군의 주력이 광양에 진입한 것은 10월 22일이었다. 광양에 진출해 있던 반군은 당일에 경상남도 하동에서 섬진강을 건너 광양으로 진입하던 마산 주둔 제15연대를 기습해 연대장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진압작전은 무산됐고, 제15연대는 하동으로 철수했다. 반군이 제15연대를 기습했던 곳은 광양읍 죽림리 소재 솔티재였다.
이날 반군은 30여 대의 트럭에 지원부대를 기습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반군 백운산으로…민간인도 수난
정부군의 진압이 거세어지고 더 이상의 물리적인 저항이 불가능해지자 반군은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아울러 광양을 점령했던 반군은 10월 23일 옥곡면을 걸쳐 백운산으로 입산했다. 이후 광양 주민들은 빨치산과 진압부대의 사이에서 많은 고통과 희생을 당했다.

▲ 1948년 6월, 대동청년단 광양지부결단식, 죽창을 든 소녀들이 사열받고 있다.<이경모 作>
광양에서는 1948년 10월 말경부터 좌익혐의자에 대한 색출과 학살이 본격화됐다. ‘6ㆍ25전쟁사 1’에는 광양의 반군을 처음 공격했던 부대를 문중섭(文重燮) 소위가 이끄는 광주에 주둔했던 제4연대 소속의 2개 소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광양에 진입한 것은 23일 오전 무렵이었다. 이 부대는 반군과 좌익 세력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는데, 15세 이상의 주민들을 모아 놓고 인민군 행세를 하며 좌익 세력을 색출해 집단 학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10월 24일 토벌사령부가 여수 1차 공격에 나섰으나, 반군의 격렬한 저항에 송호성 사령관이 부상을 입고 후퇴했다.

이때 여수에 남아 있던 여순사건 주도인물 한 사람으로 알려진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잔여 병력과 여수 보안서장이었던 유목윤 등 지방좌익이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입산했다. 이들은 유목윤을 중심으로 ʻ백운산 여수부대ʼ를 창설해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백운산 여수부대'는 전남도당의 핵심부대로 1953년까지 백운산을 주무대로 활동하였으며, 남태준 사령관이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광양은 백운산을 비롯해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는 주요 근거지가 됐다. 빨치산은 1949년 9월에 조직을 재편하는 것과 더불어 각 지역에서 적극적인 무장공세에 나서는 이른바̒ ʻ9월 공세ʼ에 돌입했다.

백운산 지역은 이현상(李鉉相)이 지휘하는 인민유격대 제2병단 제7연대로 편성됐다. 백운산에 사령부를 둔 이들은 순천 남부・곡성 북부・하동・광양・구례 남부 지역을 관할했다.

그리고 1949년 9월 16일 새벽 빨치산 약 150명이 광양 읍내를 공격했다. 이들은 전화선 절단, 광양경찰서 및 지서ㆍ주요 관공서ㆍ광양서국민학교(국군 제15연대 제1대대 본부 주둔지) 등지를 습격했다. 이날의 사건으로 광양경찰서 등 광양 지역의 주요 관공서가 불탔고, 경찰 9명과 군인 20명이 사망했다.

빨치산이 철수한 직후 광양경찰은 광양읍을 비롯한 각 면에서 좌익에 협조적인 주민들을 색출했다. 이날 100여 명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연행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살해됐다. 민간인의 집단 희생이 발생한 장소들은 구산리 우두마을, 덕례리 반송재, 사곡리 솔티재, 세풍리 검단재, 순천시 서면 구랑재 등이었다. 이후에도 빨치산의 토벌작전이 계속됐고, 광양군민들은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어야 했다.

한국전쟁 발발 그리고…

6ㆍ25전쟁이 발발했다.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남하와 초기 패전으로 남한군은 거듭 후퇴했다. 그 결과 전선은 낙동강 방어선으로까지 밀려왔다. 남한군과 유엔군은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총반격에 나섰다. 이와 같은 6ㆍ25전쟁 초기의 전선 변화는 후방 지역인 광양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민군은 6ㆍ25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뒤인 7월 25일 광양에 출현했다. 7월 23일 광주로 진입한 인민군의 주력이 낙동강 방어선을 향해 나갔고, 그 가운데 일부가 광양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인민군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광양에는 인민위원회가 설치됐다.

▲ 남로당 전남도당 사령부 터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다압면의 농민 출신이었던 김을수(金乙洙)였고, 부위원장은 북에서 내려온 정균화가 맡았다. 광양인민위원회는 북한식 토지개혁을 진행하고, 각종 부역과 의용군 등에 주민들을 동원시켰다. 골약면 하포가 바라다 보이는 야산 일대, 즉 염포에서 광포에 이르는 해안선 산등성이에 골약면 주민들을 동원하여 남한군의 상륙에 대비한 참호를 구축한 것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미처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좌익 세력들은 인근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다시 빨치산 활동을 했다. 광양에서도 10월 1일경 인민군이 일제히 철수했다. 아울러 광양에서 활동하던 좌익세력들은 백운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6ㆍ25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광양 군민들은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의 틈바구니에서 고통을 당하며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6ㆍ25전쟁기에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951년 1월 14일 백운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800여 명이 광양읍사무소・광양경찰서 등 광양의 주요 관공서를 일제히 습격한 것이었다. 이 사건 직후 군경은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 중이던 좌익 혐의자와 그 가족 등을 1월 16일경에 같은 장소들에서 학살했다. 이 외에도 광양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빨치산의 습격과 군경 토벌대의 좌익 혐의자 색출 및 학살이 반복적으로 발생함으로 인해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였다.

지난 2009년 전남대 사회과학연구소는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연구용역을 받아 광양지역 민간인 피해자를 조사했다. 이 조사 결과 민간인 피해자는 총 560명으로 파악됐다. 이중 군과 경찰 등 우익에 의한 피해가 73%를 차지했으며, 18%가 지방좌익과 빨치산 등에 의한 피해였다. 그리고 전남대에서는 광양지역을 전수 조사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는 실제 민간인 피해자의 30% 수준 정도라고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혔다.

현대사의 기억 그리고 사라진 흔적
해방 이후부터 6ㆍ25전쟁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광양의 주민들은 해방과 자치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지만, 여순사건과 6ㆍ25전쟁 이라는 동족상잔의 참화 속에서 백운산 아래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광양의 호국항쟁 관련 사적지는 이러한 광양의 현대사와 연관되어 존재하고 있었다. 광양의 호국항쟁 관련 사적지 중 일부는 그 흔적이나 터조차 찾기 힘들만큼 변화하거나 아예 사라져 버린 곳도 있었고, 또한 일부는 원형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은 채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광양군민들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며 해방축하군민대회를 개최하였던 광양서국민학교는 현재에도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모습을 회상하기에는 세월의 무게가 과중하다. 광양건준 치안대가 사무실로 사용했던 광양경찰서는 얼마 전부터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원형은 찾을 수 없는데, 안내판도 설치되지 않았다.

해방 당일 이은상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모여 자치조직의 결성을 토의했던 광양경찰서 무덕정도 남아 있지 않다.
해방 전후한 시기에 광양의 대표적인 집회 장소였던 화신광장은 1958년 개인에게 불하돼 현재는 건물과 도로가 놓여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이다.

해방 당시 광양건준과 인민위원회의 사무실이었던 광양읍사무소는 광양역사문화관(구 광양군청) 옆 도로에 위치했는데, 현재는 다른 건물들이 신축되어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 외 각 읍면별 사무소와 지서의 위치가 현재와 같은 곳도 있었으나, 빨치산의 습격으로 불탄 뒤 새로운 장소에 증축됐던 경우도 있었다.

광양건준과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을 지내고 전라남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을 지낸 항일독립운동가 김완근의 거주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광양읍 구산리 135번지 유림정(柳林亭) 일대가 그가 살았던 집터였다.

정순화의 주거지는 도시 개발 과정에서 멸실되었는데, 주민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묘는 최근 후손들에 의해 타 지역으로 이장됐다. 정진무의 주거지는 건물은 해체되고 빈터로 남아 있었고, 박봉두의 주거지만 현존하고 있다.

▲ 충혼탑 비문
한편 광양에는 6ㆍ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국가 유공자들을 추모 또는 기억하는 시설들이 남아 있다. 광양읍 덕례리에 위치한 무명의 순직 경찰관 묘지, 옥룡면 산남리 산본마을 앞 백운산지구 전몰장병 위령비, 유당공원 내에 위치한 옛 충혼탑과 참전군인 유공자 기념시설 그리고 중마동에 위치한 현충탑 등이 그 사례들이다.

여순사건부터 6ㆍ25전쟁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장소들도 격동의 현대사에서 발생한 아픔을 치유하고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기억돼야 한다. 광양읍 우산리 우두마을ㆍ광양읍 덕례리ㆍ광양읍 세풍리 뒷산(순천시 해룡면 검단재 인근)ㆍ순천시 서면 구랑실재ㆍ광양읍 덕례리 반송재ㆍ광양읍 사곡리 솔티재ㆍ진상면 비평리ㆍ봉강면 광양서천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장소들의 일부는 당시와 완전히 달라졌으나, 일부는 약간의 변형을 걸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외에도 백운산 인근의 마을은 많은 학살지가 있으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시설들도 있다.
호국항쟁 관련 사적지는 아니지만 여순사건과 6ㆍ25전쟁기 전남도당 본부와 연병장 등이 있었던 곳도 성찰되어야 할 장소들이다. 이러한 장소들은 주로 옥룡면 백운산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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