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들의 서랍 - 최승호

돌들의 서랍
최승호


한밤중 창문을 누군가가 거칠게 두드리고 있었다
열었다
사람이 아니었다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창문을 닫으면 다시금 누군가
거칠고 다급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멀고 어둠 깊은 데까지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보였다 한 무리의 털벌레들이
캄캄하고 질척한 어둠 저쪽에서
거멓게 꿈틀거리며 오고 있었다

불행이 우리를 서로
가깝게 했나 보다
바위굴 속의 가재들과
돌들의 서랍 속 정신병자와
내가 울증의 시대에 서로
가까워지나보다

이렇게 멀쩡한 나
나를 전기 쇼크로 치료하는
내 담당 의사는 형사라고

두려움에 떠는 얼굴이 있다
갈수록 딱딱해지는 공기 속에서
나는 한 마리 北魚로 변신한다고
신음하는 化身妄想의 얼굴이 있다

밤이다 창 밖에 범 눈의 밤이 파도친다
꿈이 꿈길을 가는 것이
표적들이 창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내 안에서 거대한 北魚들이 울부짖는다
北魚들이 창을 향해 나아간다
표적들이 창을 향해 나아간다 피를 흘리며
표적들은 창을 향해 나아간다
이렇게 쓴다 밤이다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창밖에서 노려보는 키 큰 털벌레들은
해가 뜨면 또다시 빛 푸른 나무들로 변할 것이다

 

시인 최승호

  1. 년 강원 춘천 출생

현대시학 <비발디> 등 추천

  1. 년 오늘의 작가상 외 다수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외 다수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에서의 시인은 어둡다. 음습하고 자꾸만 바람에 휩쓸려 콘크리트 외벽을 오가는 빈 깡통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 소거 상태다.

시인의 첫 시집 <대설주의보>가 보여줬던 단정함 중에도 날카로웠던 시어들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대신 불안한 도시의 뒤편에서 울리는 불안한 울림 속에서 다만 음울할 뿐이다.

도시 문명의 병폐와 부조리, 그리고 박제화돼 버린 삶을 살아내는 시인의 시각이 고스란하다. 그래서 시집 안에 든 대부분의 시들은 마치 고슴도치와 같으니 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집 제목 하나는 참 절묘하게 뽑아냈구나 하는 씁쓸한 감탄사가 툭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시 <돌들의 서랍>에 담긴 정서 역시 마찬가지다. 시의 세계는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세상인데 가장 주목할 시어는 <化身妄想>이다. 기괴한 도시 어느 방 한 칸을 차지한 채 움츠려 사는 도시민의 잔뜩 위축된 정서가 함축된 말이기도 하거니와 실상 그것은 도시의 본 모습이기도 한 까닭이다.

이처럼 도시의 병적인 징후들을 괴기스럽게 차려내는 것은 최승호의 시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힘이기도 한 것인데 <고슴도치의 마을> 발간 당시 최승호의 도시에 비해 현 도시의 모습은 화려함 속에 그 음험함이 좀 더 깊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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