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선 작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던 언니는 제게 말했습니다. "시골에 엄마만 홀로 두고 떠나오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텐데 네가 있어서 편안한 맘으로 서울 올라올 수 있었어. 네가 효녀야” 날 부추겨 세우는 언니의 말에 참으로 거북하고 멋쩍어 했습니다.


저는 자립할 나이를 훌쩍 넘기고 어느덧 반백 살, 오십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돌봐야 줘야 하는 못난 자식이고 애물단지입니다. 매일 하루 세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는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살고 있습니다. 고마움도 모르고 당연한 듯 위세 부리며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염치없고 불효막심한 딸입니다. 그런 제게 불시에 효녀라고 칭하니 참 낯간지럽고 민망했습니다. 언감생심 효녀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효녀 심청이가 들으면 가소롭다며 웃을 일입니다. 불효녀라는 꼬리표만 떼어도 무거운 제 마음은 좀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중증 장애를 가진 못난 딸 때문에 엄마께서는 연세보다 폭삭 늙어버려서 슬프고 속상합니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르고 야윈 엄마를 보면 가슴이 아프고 안쓰럽습니다. 힘든 밭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좀 편하게 쉬시면 좋겠는데 한시도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십니다. 하다못해 냇물을 길러오고 빗물도 받아놓았다가 화분에 물을 주십니다. 수도요금이 나오면 얼마나 나온다고 그런 수고를 하시느냐고 온갖 타박을 하고 말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보일러 온수 버튼만 누르면 따뜻한 물로 편하게 씻을 수 있는데 한사코 바깥 아궁이에서 물을 데워 와 씻으시는 불편한 생활을 고집하십니다. 굳이 고생을 사서 하시는 엄마를 보면 마음이 답답하고 속상해서 짜증을 내고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엄마께서는 수도가 없던 시절에 동네 우물물을 길어 쓰시던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셨습니다. 쌀 씻은 물에 세수하고 발 씻고 또 걸레를 빨고 그 물도 헛되이 버리지 않으시고 나무에 그 물을 주셨습니다. 한 방울의 물도 참으로 아끼고 아끼셨습니다. 나무를 아껴 쓰면 산신령님이 보살펴 주시고 물을 아껴 쓰면 용왕님이 보살펴 주신다면서 오늘도 울 엄마는 한결같이 아끼는 삶을 살아가십니다.


당신 몸 챙기지 않고 아끼는 데만 열중하는 엄마를 보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다. 장애인 딸을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녹록하지 않으실 텐데 아끼는 삶 때문에 더 고달픈 인생입니다.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돕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제 현실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께서는 한기가 심하게 든다며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걱정이 돼서 새벽에 자다 깨 엄마를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어 가까이에서 만져보니 이미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의식불명인 엄마를 붙들고 울며불며 읍에 사는 오빠에게 연락했습니다. 오빠가 부른 119구급차에 실려 엄마는 병원 응급실로 급히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엄마가 깨어나지 않을까 봐, 혼자 남게 될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온갖 생각을 다 하니 덜컥 겁이 나고 무서웠습니다. 한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저를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시는 엄마를 맘 상하게 하고 걱정만 끼치게 한 제가 죽도록 밉고 후회스러웠습니다. 몇 시간 뒤, 응급실에 가신 엄마는 치료를 받고 깨어나셨다고 오빠한테서 연락이 왔지만, 엄마 목소리를 들어야 저는 안심이 될 것 같았습니다. 쿵쾅거리는 제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말할 힘도 없으실 엄마와 기어이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겨우 잠을 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역시 전 이기적인 딸이었습니다.


엄마의 건강 상태보다 저의 마음 챙김이 먼저였습니다. 이젠 제 마음 편한 대로가 아닌 엄마의 마음을 먼저 돌아보고 챙겨야겠습니다. 효도는 성공한 자식이 부모님께 호의호식시켜 드리며 봉양하는 걸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효도를 한다는 것은 제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비싼 옷, 비싼 음식을 사 드리고 해외여행 보내드리며 호강시켜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엄마랑 함께 밥 먹고 얘기하며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눌 때 느끼는 작은 기쁨이 어쩌면 더 값진 효가 아닐까요.


효를 거창하게 생각하면 어렵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효를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검소한 생활과 절약 정신이 지나쳐 궁상스럽게 보였던 엄마의 삶을 존중해야겠습니다. 엄마를 위한다고 이래라저래라 찡그린 얼굴로 잔소리하지 않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마음 편하게 사시도록 지켜봐야겠습니다. 분명 몸보다 마음 편한 것이 더 좋을 테니까요.


다음으로는 엄마가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해도 처음 듣는 듯 진솔하게 경청하고 맞장구쳐야겠습니다. 당신 살아오신 인생 보따리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습니다. 수많은 보따리 중에 그 어떤 보따리를 풀더라도 엄마 마음이 홀가분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어줘야겠습니다.


끝으로“엄마!”라고 부를 수 있고, 안을 수 있는 엄마께서 곁에 계실 때에 손을 따뜻하게 잡아드리고 다정하게 꽉 안아드리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야겠습니다.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 쑥스러운데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거란 생각은 거두고 사랑 표현, 감사 표현을 아낌없이 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처음엔 쉽지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작정하고 보니 이 정도쯤이야 제가 충분히 할 수 있는 효이지 싶습니다. 거창한 행동만이 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마음에 품은 작은 효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저와 소소한 일상을 지내시는 엄마의 하루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엄마의 이야기보따리에서 아픔과 고통이 서린 한이 아니라, 즐거움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흥이 펼쳐지길 바랍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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