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나의 농사일은 소득을 앞세우는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750여 평의 밭에 50여 작물을 삽과 괭이로 달려들 때부터 유전적 요인과 노년의 대책 없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을까에 대해 의심도 해봤으나 나름의 충분한 역사성은 있었다. 효심이 남다른 아버지는 농학으로 모진 고생을 한 할아버지의 “천직(踐職)이 자식을 보전한다.”는 유지를 받들어 “등허리에 뿔난 놈(지게를 진사람)은 전쟁도 피해간다.”며 밥상머리 앉으실 때마다 공부를 좋아하는 막둥이에게 농사가 제일 좋은 직업이니 중학교까지만 다니라 고 언명 하셨다. 무학이시지만 5일 시장에서 완판본 책들을 사서 읽으시고 여름철 당산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임진록’ 등 이야기로 여생을 보내셨다. 효와 근면과 성실을 강조한 말씀을 요즘 들어 회상해 보면 고된 농사일에서 몸 공으로 지혜를 깨쳐온 분이셨다는 생각을 해본다.

농사의 첫출발은 37년의 농협 생활을 하면서 불편하게 들어온 ‘수탈농업’이라는 말에 반대되는, 땅에 돌려주는 농사를 실험해 보고 싶었다. 심하지 않은 눈비는 개의치 않고 소두엄을 깔아주고 땅을 갈아엎기를 반복했다. 12cm 정도로 갈아엎는 작업기와 달리 삽은 32cm 이상의 겉흙을 만들어주었다. 지렁이가 우글거리고 떼 알 조직으로 변한 토양은 아내의 당부에도 장갑을 벗고 흙을 만지는 나에게 낚시꾼의 손맛, 일부 민족들의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의미를 이해케 해 주었다.

집사람이 챙겨주는 간식을 제대로 먹지도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고된 삶의 반복이었지만, 작물은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성실함. 뿌린 대로 거두어드린다는 정직함.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자연을 경애하는 겸손함. 잡념과 걱정을 잊게 해주는 충일감. 유일하게 경쟁심 없이 협동과 공존으로 착하고 선한 심성을 갖게 해주는 흙의 가르침 등 노년의 깨우침을 경험한 의미 있는 나날이었다.

대상포진과 요로결석으로 고생을 하고 허리와 관절의 불편함으로 치료도 받았지만, 인간으로부터는 지식을 배운다면 자연으로부터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농사를 통해 작은 성취를 경험한 나는 또 다른 성취에 도전하면서 그 뒤 경로우대의 나이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를 들어가 4년 만에 졸업하고, 칠순기념으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도보여행을 다녀왔으며, 수필가로서 활동하는 등, 이 모든 것이 10년 이상의 고된 농사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대보름을 전후하여 농악단이 마을을 돌 때 앞장선 농기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적혀 있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백성의 삶이 풍요롭고 국민의 생활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천하의 근본인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뜻도 있겠지마는 농사처럼 숭고한 생업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농사가 천직이라는 인식과 할 일 없어 마지못해 고향에서 농사나 짓는다는 생각에 나는 반대한다. 한 예로 한때 찬란했던 잉카문명 등은 대소변의 처리에 미숙하여 땅을 황폐화해 멸망했다는 일설이 있다. 서구의 도시들이 대소변의 처리가 지혜롭지 못해 근대식 하수처리 기술이 도입되기 전에는 도시가 하수로 넘쳐나고 콜레라 등 전염병이 수시로 만연했다 한다. 한국은 대소변까지도 가장 지혜롭게 처리한 농업 국가 이였다. 코로나 이후 경쟁 사회가 주는 소득의 불균형을 개선하고 자연 친화적이며 협동과 공존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농업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9명의 자녀 중 6명을 먼저 보낸 정약용은 그의 심지 굳음과 지혜로움에도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막둥이 아들만은 그저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라는 뜻으로 ‘농아’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다.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 대작과 많은 책을 남겨 불후의 대문호로 기억되고 있지만 실은 누구보다 농업을 사랑하여 농업학교를 세우고 농업교육과 경영지원 활동에 매진하였다고도 한다. 무위도식하는 귀족이나 부유층을 비난하는 뜻으로 글을 썼으나 잦은 아내와의 다툼으로 여자의 심리묘사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고, 농민들의 구독을 위해 쉽고 명료한 글쓰기가 결과적으로는 많은 독자의 찬사를 받았다 한다. 『토지』라는 대하소설을 쓴 박경리는 노년에 그의 평소 외로움과 고단한 마음을 간절히 담아 이런 시를 썼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농업을 예찬하고 그리워한 마음이 어디 이뿐이랴!

지금은 독서와 글쓰기를 위한 체력유지를 위해 농사 시간은 거의 줄이고 규칙적인 산행으로 몸을 추스르지만, 퇴직 후 10여 년 농사에 전념해본 시간은 나의 삶에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서구의 사람들이 신을 사랑하여 돌로 성전을 쌓았지만, 인간을 사랑한 신은 돌을 바수어 흙을 만들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산다. 흙에 파묻혀 아침이슬로 닦고 황혼으로 곱게 물든 내 영혼은 이름 모를 풀꽃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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