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정치 - 최하림

겨울정치精緻
최하림

큰 나무들이 넘어진다 산과 산 새에서
강과 강 새에서 마을 새에서
길을 벗어난 사람이 어디로인지 달리고
길러진 개들이 일어서서
추운 겨울을 향해 짖는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걸어간다
저녁 그림자처럼 걸어간다 마을도
나루터도 사라지고 과거도 현재도
보이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들의
불길한 울음만 공중에 떠돌며
얼어붙은 겨울을 슬퍼하고

언덕도 상점도 폭설에 막히고
거리마다 바리케이트 쳐져
사람들이
어이어이어이 울부짖고
갈색 옷을 입은 사내 몇, 들리지 않는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그 소리들이 모여
겨울나무를 넘어뜨린다

꽁꽁 언 새벽 여섯 시, 지령地靈처럼 걷는
사람들 새로 우리들은 걸어간다
살얼음의 아픔이 여울마다 일어나고
흰 말의 무리가 하늘의 회오리 속으로
경천동지하며 뛰어올라 갈기를 날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단의 사내들이
사냥개를 끌고 온다 개들이 짖는다
이제는 얼어붙은 우리들의 꿈이여
눈과 같은 결정체로 삼한三韓의 삼림에 내리어 오라
기다리는 노변에서 상수리숲도 우어이우어이
울고 겨울새도 울고 우리도 울고 있다

시인 최하림

  1. 년 전남 신안군 출생
  1. 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2. 산문시대> 동인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외 다수

  1. 년 사망

이 시 겨울정치는 1982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한 시집 <작은 마을에서>에 실린 작품이다. 연이은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다. 특히 80년대는 박정희 군사정부가 청산되자 어느 때보다 민주화 열기가 강하게 분출됐던 시기다.

가택연금을 당했던 김대중 선생이 풀려나오는 등 모두들 봄날을 꿈꾸었으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비롯한 일군의 군인들이 민주의 꽃 모가지를 또다시 분질러 버렸다. 그러하니 시대는 더욱 추운 겨울로 치달았고 희망이 깊었던 만큼 절망의 나락도 끝이 없었다. 겨울정치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담고 탄생했다.

여기 차려진 겨울은 필연코 억압적 정치 상황에 대한 명백한 은유다. 이 시는 겨울 속에 갇혀 있는 사람과 사물의 풍경에 대한 묘사를 통해, 현실의 지배적 원리로 움직이는 정치 상황을 우의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걸어간다’라는 구절은 후배 시인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에 등장하는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라는 구절로 이어진다.

“언덕도 상점도 폭설에 막히고/거리마다 바리케이트 쳐져” 같은 구절도 당시 정치 상황이 우리 삶에 가할 폭력과 수난을 예감한 데서 문득 느끼는 섬뜩한 공포이다. 엄혹했던 사회적 분위기의 상징이다. 최하림은 그런 불길한 시대를 피 토하듯 토해냈던 시인이었다.

※ 시인 최하림과 나는 악연이 상당하다. 물론 나를 알지 못하는 최하림에겐 인연이랄 것도 없을 일이나 그에게 된통 당한 바 있는 나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 언제나 뒤끝에 언제나 쓴맛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1999년 겨울 초입 지리산 화개를 떠나왔던 나는 그해, 별 할 일이 없던 나는 광주의 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하던 친구의 방에 깃들었다. 그 겨울 내내 술을 마셔댔고 간혹 눈이 오는 날이면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도전했다. 나중에라도 내 인생이라는 놈에게 미안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작은 울림에 끌려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심사위원이었다. 당시 그는 나의 졸시 <감나무 옆에는 방이 있다>를 당선작으로 꼽으면서 “서정성은 뛰어나나 견고함이 부족했다”는 해찰을 부려놓았는데 그의 말에 한동안 가슴이 숭숭 뚫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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