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계절의 변화에 따라 알맞은 옷으로 갈아입고, 절기에 따라 철에 맞는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이듯 나이가 들며 세상과 그 안의 삶과 우리의 바람들에 대한 인식도 변화해 가는 것 같다. 가뭄이 있어 단비가 기다려지고, 뙤약볕이 있어 당산나무 그늘이 고맙게 느껴지며, 고됨이 있어야 밥이 꿀맛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이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사실 말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에 대한 인식과 의미가 바뀜을 작품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젊은 이십대 질풍노도 시기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라며 차라리 세상을 포기하겠다”며 파티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 마음을 빼앗긴 로테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젊은 베르테르는 마침내 죽음을 택한다.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구상해 일생 퇴고를 거처 삶을 마감하기 한 해 전에 완성한 『파우스트』에서는 “이론은 모두 잿빛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라고 말한다. 지식의 극점에 도달한 인간은 삶의 궁극적 의문에 방황하며 관능적 쾌락과 숭고함 사이를 헤매다 마침내는 언제나 노력하며 애쓰는 평범한 삶의 계속됨의 소중함을 찬양하기에 이른다.


일본 근·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일본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나쓰메 소세키는 길지 않은 그 삶의 끝에서 다음과 같이 심정을 끄집어내 보여준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 풀과 나무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특히 봄볕은 더할 나위 없이 좋군요. 저는 그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체념이 아니라도 절제되고 적당히 관조하는, 눈이 맑은 삶에는 평범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이 보이고 좋게 인식하는 내공이 생겨남을 보여주나 우리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코로나19 까지도 인간에게 의미있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노르웨이를 여행하다 보면 숫자8을 의하는 ‘오따(otta)'라는 지방이 있다. 13세기 흑사병이 만년 할 때 마을 전체에 오직 8명만이 살아남고 모두가 죽은 사실에서 지명이 연유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1만2천년 전 농경을 시작한 이래 지구상의 모든 야생 포유동물의 83%와 식물의 절반을 멸종시켰듯 질병 또한 인간을 철저하게 보복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인간의 70% 이상이 감소하게 되면 남은 30%는 집단면역이 생겨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종전의 질병들이 노약자나 어린이들을 집중공략 하였으나 코로나19는 기저 질환자가 더 위험 하나 축구 스타 호날두나 테니스의 조코비치, 남자골프 세계랭킹 1위 더스틴 존슨 등 최고의 체력을 자랑하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도 감염 시켰다는 점이다. 지긋지긋하고 얄미운 코로나19가 우리들이 잠시 잊고 지낸 일상의 소중함을 환기하고 공존과 평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는 것 같다.


최근 시립도서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평소의 소신에 확신이 생겼다. 서양의 기원이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동양의 역사 또한 삼황오제(三皇五帝)로 출발하며 수많은 성인과 현자,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들을 기록하고 이야기로 전해진다. 그러나 긴 중세동안 서양은 5%의 제왕과 종교 지도자 외 95%의 농노가 존재하였고 우리나라 역시 5%의 통치자와 양반 외 95%의 평민과 천민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왕(王; 양손에 무기)자와 제후의 후(侯; 화살)자 에는 무기를 음미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역사에서 큰일을 했다는 황제나 영웅 중에 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은 자 있었던가. 이름 없는 잡초처럼, 뿌리박고 있는 이 땅밖에 모르면서, 외세에 도륙되고 가난과 질병으로 쓰러지면서도 이 땅과 운명을 같이하며 지켜낸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지금까지 역사로 기록되고 전해지는 문학 속 이야기에는 95%의 우리들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소외되고 스스로 포기하며 잊혀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들의 할머니들은 인자한 눈으로 품에 안은 손자를 내려다보며, 하늘을 우러러보고(主仰主仰) 살라며 쓰다듬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라(道理道理)고 어르면서, 진실하라(眞眞) 가르치셨다. 품앗이에는 품삯의 차이는 없었고 일을 더 잘한 사람은 보람과 자부심으로 만족했다. 많이 부족해도 고구마 하나라도 나누어 먹었고 이웃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생각하며 고락을 같이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비범하지 않으면 어떠랴, 큰 의미가 없으면 설혹 어떠하랴. 선하고 정직하고 성실이 살며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부모로서, 사랑스러운 자식으로서, 말은 못 해도 오직 사랑을 가슴에 품고 서로 살피며 사는 배우자로서, 서로 고마워하는 벗과 이웃으로 살면 되지 않을까? 능력이 갑질과 제 몫 챙기기로 변해 각박해지고 어려움을 넘어 울분마저 느껴지는 요즘 바람 이전에 우리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갖고 서로를 아끼며 변함없는 자연과, 고마운 이웃과, 소중이 간직되어온 미풍양속을 되돌아보며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의미와 소중함을 찾아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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