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선 작가

유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복은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입니다. 고종명은 주어진 명을 다하고 고통 없이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실 오신 동네 어르신들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시다 죽는 게 겁난다고 종종 말씀하십니다. 오래 살고 싶다는 숨은 마음을 은근히 내비치는 줄 알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어설프게나 알겠습니다.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느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거나 불치병으로 고통받으며 이 세상을 등질수도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고종명과 같은 죽음을 바란 것처럼 여느 사람들도 그와 같은 평온한 이승과의 작별을 원합니다. 또렷하고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색색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집을 종착역 삼아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슬며시 작별할 수 있는 걸 가장 큰 복이라 여깁니다. 큰 병 없이 노쇠하여 생을 마감하신 어르신을 우린 흔히 호상이라고 하는데,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젊은 나이에 죽으면 좋은 죽음이 아닌 걸까요?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인생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은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어떤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그 과정만이 온전히 개인의 몫 입니다. 어느 날 불시에 죽는다 해도 아쉬움 없이 떠나려면 우리는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책 <푸른 하늘 저편>에 등장하는 어린 꼬마 해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느닷없이 허무하게 죽습니다. 저승세계는 못다 한 일이 남아있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영혼의 최종 목적지는 그레이트 블루 욘더라는 곳입니다. 그곳은 마음의 안식을 찾은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해리는 죽기 전에 볼펜 때문에 누나랑 대판 싸우며 서로 해서는 안 될 막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해리가 누나한테 말했습니다. "내가 죽어 봐 그땐 후회하게 될 걸!" 해리 누나가 대답했습니다. "웃기지마! 오히려 기쁠걸!" 이렇게 진심이 아닌 홧김에 했던 말이라는 걸 서로가 잘 알지만 떠난 사람도 남은 사람도 죄책감으로 쓰라리게 아파합니다.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푸른 하늘 저편으로 떠나려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될 모진 말과 행동으로 상처 주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어딘지 모를 종착역으로 인해 우리는 어쩌면 용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기회조차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옛말에 해가 넘어갈 때까지 화를 품지말라고 한 이야기의 연유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오늘 하루가 내일은 찾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어서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사는 동안 순간순간 용서받고 순간순간 사랑하고 순간순간 감사해야 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긍정의 상징인 빨강머리 앤은 이름이란 그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멋지거나 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름이 이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이름을 예쁘게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함을 알려주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름답고 유쾌한 기억을 남겨서 자신을 추억할 때 이름 자체로만 떠올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내가 ‘그를’ 기억하는 인연은 소중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남은 이들에게 나는 어떤 이름으로 기억이 될지 생각해 봅니다. 빛나고 자랑스러운 이름은 못돼도 떠오르면 기분 좋아지고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가슴 따뜻해지는 밝은 이미지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짠하고 원망스러운 어둔 이미지로 기억되지 않도록 예쁜 웃음 머금고 살아야겠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에 걸맞도록 어질고 착하게 ‘인선이에게’ 고운 빛깔을 칠해야겠습니다. 고종명의 오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별은 작정했어도 소중한 인연들을 슬픔에 빠트리겠지만 이 세상 소풍, 아름답게 끝내고 환한 미소로 푸른 하늘 저편으로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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