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선 작가

▲ 정인선 작가

"얼른 일어나서 밥 먹어라!" 아침을 깨운 엄마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오자마자 눈이 번쩍 뜨이며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납니다.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가 후루룩 씻고 후다닥 화장을 합니다. 암만 바빠도 엄마의 밥상은 거를 수가 없지요. 옷에 맞춰 굽이 낮은 아이보리 구두를 신고, 지난주 새로 구입한 검정 빽팩을 둘러메고 현관문을 부리나케 나섭니다. 조급해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느긋하게 이웃 주민들과 환한 미소로 밝게 아침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촉박한 출근 시간이라 단거리 선수처럼 긴 머리를 휘날리며 전력 질주하는데 살랑살랑 들이치는 바람에 덜 마른 머리카락이 바싹 마르길 기대합니다. 지하철 계단도 두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내려갑니다. 마주보며 올라오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승강장에 도착하니 운 좋게 지하철 출입문이 스르르 열립니다. 이미 도착 방송을 들으며 콩닥거린 가슴은 더 졸일 여유도 없어 냉큼 지하철에 탑승합니다. 러시아워인 때인데 이상하리만치 오늘은 객차가 혼잡하지 않습니다. 정신없이 달린 아침 시간이 지하철 안에서 차츰차츰 진정되어 하루 일과를 더듬어 봅니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사무실로 들어서니 향긋한 커피 향이 먼저 인사를 건네고 언제나 상냥한 단발머리의 옆 동료는 이미 내린 원두커피로 정신을 가다듬는데 도움을 줍니다. 아침기상이 빠르다는 단발머리 옆 동료는 당연한 듯 저의 하루 일과를 정신 바짝 차리게 도와주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고마워할 뿐 출근 시간이 서로 뒤바뀌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독자의 성향과 저자의 메시지 등을 고려하여 책의 표지 및 내지를 디자인하는 북디자이너가 저의 직업입니다. 지난주 고객이 의뢰한 책은 이미 읽었기에 어렴풋이 그려진 윤곽을 떠올리며 디자인할 책에 알맞은 삽화나 글의 배열, 글꼴의 크기, 색, 음영 등을 선정하고 오후에는 고객에게 제안할 내용을 팀원들 앞에서 발표하는 날입니다. 선임들의 발표 자료를 참고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최근 북디자인의 흐름과 소비자의 욕구에 맞는 디자인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손놀림이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기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책의 표지, 내지를 디자인하고 글의 위치 등을 배열하는데 총 세 개의 디자인 안을 작성해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하는 일부터 오후가 시작되었습니다. 치렁한 머리카락을 질끈 묶어 긴장된 마음까지 단단히 동여매고 흐트러짐 없이 준비된 내용을 발표합니다. 처음에는 언제나처럼 살짝 목소리가 떨렸지만 뭐 30초 정도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제 일에 대한 의견을 마음껏 직원들에게 전달하며 모니터링을 합니다.

소비자의 바람이 반영된 책이 출판되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최종 인쇄 결과물이 나오도록 신나게 일할 생각에 설레는 걸 보면 역시 저는 현시대의 트렌드를 잘 파악하고 있는 북디자이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고 독자의 선택을 기다리며 서점의 가판대에 오를 날을 생각하면 색채나 배열 등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어 신경이 바짝 쓰이지만 아침출근 시간만 정신없을 뿐이지 매사에 꼼꼼하고 세심해서 영락없이 이 일에서는 프로입니다.

퇴근 후 북디자인팀 동료들과 근처 식당에서 조촐한 회식이 있습니다. 지난달 출판한 책 역시 소비자의 취향을 저격했기에 바로 판매 부수에 변화를 보이며 여러 서점에서 러브콜을 받았다고 부장님이 두둑한 금일봉으로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는 자리입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며 계절과 종류에 무관한 수다꽃을 피우느라 왁자합니다.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토닥토닥 마음을 위로해주는 화기애애한 회식자리엔 행복한 향내가 진동합니다.

한 주의 수고를 덜어내기 위해 조금 일찍 헤어졌지만 왠지 아쉬운 마음에 동네 포장마차로 친구를 불러 한 잔 더 마십니다. 내친김에 동행 노래방에도 들러 목청껏 신나게 “내가 음치로소이다”하며 광고를 합니다. 듣지만 않는다면 헤드뱅잉 하며 당당하게 부르는 제 모습에 사람들은 몹시 감탄하며 부러워할지도 모릅니다. 대단한 실력이라고 말입니다. 명분 없는 부름에 동행한 친구도 우스워죽겠다며 낄낄거리고 그 모습이 우스워 저 또한 깔깔거리다 우리는 서로 배를 잡고 웃느라 노래 부르기는 물 건너갔습니다.

취기로 달아오른 얼굴을 시월의 선선한 밤공기가 부드럽게 식혀 줍니다. 주저 없이 달려온 친구와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달처럼 환하게 간판이 켜진 달떡집에 들러 엄마께서 좋아하시는 인절미 한 팩을 사 들고 귀가합니다.

"엄마 나 왔어!" 현관문을 열며 호기 있게 소리칩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마셨어?" 엄마께서는 제 건강부터 걱정하시며 타박을 하십니다.

"오늘 회사에서 엄청 칭찬받았거든. 완전 기분 좋아 좀 마셨지."

"이쁜 내 딸, 잘했네! 잘했어!”

"엄마, 내일은 회사 쉬니까 우리 데이트하자!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자!"

엄마를 꼬옥 껴안고 엄마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르 달콤한 잠에 빠져듭니다. 씻지도 않았지만 찜찜하고 걸리는 것 없이 엄마의 품은 한없이 포근하고 따스한 잠자리입니다. 양치하고 손이라도 씻고 자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나직나직 들리다 한참이나 먼데 있는 것처럼 몽롱해집니다. 평범한 듯 특별한 하루를 상상해 보니 어른어른 거리는 일과가 손에 잡힐 듯 생동합니다. 숨 가쁘고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지만 온종일 기운차고 신났습니다. 참으로 멋진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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