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삼진아웃이 오늘날 경쟁의 사회에서 기회를 박탈하기 위한 마지막 경고를 대신하는 명분이라면, 정이 많고 따뜻했던 우리 조상들이 즐겨 쓰던 삼시 세판(三時三判)은 실패에 좌절하지 말고 세 번의 도전을 통해 꼭 이루어내라는 기대와 간절한 희망이, 그래도 세 번까지는 기회를 주어 보자는 관용과 용인의 바람과 조화를 이루는 말일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 문화 속에서 3이라는 숫자가 유독 자주 쓰이는 것도 같다.

우선 동양 철학에서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의미하는 천지인(天地人)즉 삼재(三才)가 있고, 인간에게 지혜를 가르쳐 세상을 열었다는 중국 전설 속 삼황(三皇)인, 인간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복희씨와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신농씨,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여와씨도 생각이 난다. 서양에서도 기원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한 탈레스와 불에서 근원을 찾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을 반박하며 만물은 수(數)로 이루어 졌다며 삼각함수를 생각해내 인간 지혜의 시대를 연 피타고라스도 그 처음을 삼각형에서 찾았다. 고대문명의 불가사의인 피라미드도 삼각형이 기본구조이고, 불교에서도 법신•보신•화신의 삼존불을 중히 모시고,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교리 중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믿음도 존중되고 있다.

우리조상들의 장례에는 삼일장과 삼오제가 지켜졌고, 제례에는 3년 상이 권장되었다. 경제학에서는 국민이 소득을 만드는 생산과 나누어 가지는 분배, 소비하는 지출이 모두 같게 된다는 삼면등가의 원칙이 있고, 경영학에서는 모든 조직원의 직무에는 권한과 책임과 의무가 동등하게 주어진다는 삼면등가의 원칙도 있다. 그 밖에도 유교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삼강오륜이 있고, 보기 좋게 살아감을 소박하게 표현하는 삼삼오오도 있다. 심지어는 최진사 댁 딸 중에는 셋째 딸이 제일 예쁘다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최근 자녀교육이나 자기 개발을 위한 지도서들이 소개되고 있다. 몇 책들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그 한계를 넓혀 가면서 성공으로 이끄는 방법으로 ‘몰입’을 이야기들 한다. 깊이 파고들거나 빠져 듦이 효과적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 몰입 전문가로 인정하는 서울대 황농문 교수는 30만 부 이상 팔린 『몰입 1』에이어 『몰입 2』를 펴내며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잠재력을 깨우는 몰임을 익혀 자신의 능력을 100% 활용하여 만족감과 지극한 행복감을 느껴보라 강조한다. 일본에서 공부의 신으로 떠오른 니시오카 잇세이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집중할 수 있습니까?』라는 책에서 도쿄대학교 상위 10%의 학습법을 이야기하며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무리하지 않고 즐기는 집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성공한 사주 실패한 팔자』에서 황충현은 ‘아무리 좋은 명을 타고나도 때를 모르면 꿈을 펴지 못하고, 알아도 의지가 없으면 꿈을 이룰 수 없다’ 말한다. 하긴 초식동물을 쫓는 사자도 최고속력을 낼 수 있는 1분 안에 덮쳐야 하니까 절묘한 순간포착에 몰입하지 않을까. 고기떼를 추적하여 그물을 내리는 어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몰입에 다가갈 수 있냐는 점이다. 우리는 언제나 긴장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삼이라는 숫자를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내 나름의 몰입에 관한 즐거움과 믿음이 있어서다. 긍정과 즐거움을 좋아하다 보면 요행과 우연도 행운으로 확신하는 경우가 있듯이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는 일상에서 리듬을 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다. 삼단뛰기를 생각해보자. 하나, 둘, 셋도 마찬가지다. 하나와 둘은 예령이 되고 셋에서 모독심 즉 힘을 집중하여 평상시보다 큰 힘을 발휘 하는 것이다. 나는 일상에서 이 원리로 내 마음에 최면을 건다. 일상의 행위 하나하나를 점으로 보고, 이점을 연결하여 선을 그으면, 선의 모양에 따라 진행을 확인하고 예측도 할 수 있다. 일상이 연결되어 스토리를 품으면 내용이 더욱 선명해지면서 호기심이 촉발되고 즐거움이 따라온다.

나는 농사를 짓다 허리 굽은 옆 밭 노인네에게 시 한 수 지어 바치고 싶어 국어국문학을 공부하였고, 절대고독과 나의 한계를 경험하고 싶어 히말라야를 다녀왔다. 하나의 성취를 둘, 셋으로 연결 지우며 충만감을 높여가고, 의지에 가속을 붙어보며, 새로운 도전을 다짐하는 것이다. 나는 요즘 틈틈이 글을 쓰고 있지만, 언젠가는 소설과 시를 구상하고 있다. 두 번째 삼각 구도를 희망하며 산다. 선조들은 남자의 일생이 팔의 승수로 진행된다고들 한다. ‘팔구 칠십이’를 넘어서려니 늙음이 모든 기능을 조금씩 가져가며 버리고 내려놓음의 소중함을 생각해보라는데, 글들도 사물에도 더 시선이 끌리고 애착이 쌓이며 한 번 더 뒤돌아보라 가랑이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계획들은 밀쳐지고 쌓여 가는데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기록해 두고 십고, 정 안되면 오려 붙어도 본다. 군함이 추동력으로 파도에 맞서듯 나 또한 앞만 보고 하나, 둘, 셋을 반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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