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서 광양여자 고등학교 3학년

▲ 김민서 광양여자 고등학교 3학년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느낄 때는 상실이나 결핍도 수반된다. 내가 그곳과 맞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누군가에 비해 한없이 부족함을 느낄 때 자신의 무력함을 체감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발견된 스스로의 나약함을 체감하고 포기해 버릴 때도 있다. 의기소침해진 자아는 이성과 합리성 따위는 오래전에 부정적인 기운들로 마모되어 떨치고 일어설 엄두조차 낼 수 만든다. 상실감으로 인한 무기력이 반복되면 희망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종일 멍한 게 마치 약에 취한 듯이, 잠에 취한 듯이 지내기도 한다.

이상의 ‘날개’에서 주인공은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사회의 여러 부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 그의 아내는 무능력한 남편 대신 밤일을 하여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어느 다른 부부와 같이 평범한 관계가 아닌 지배적인 관계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방에서 지내는데 그가 아내의 방에서 잘 때는 다른 내객들처럼 돈이라는 대가를 지불할 때다. 때문에 그는 아내의 방에서 자기 위해 돈을 모은다. 그가 비가 오는 날 외출을 하여 감기에 걸린 어느 날 아내가 준 약이 아스피린이 아닌 수면제인 것을 깨닫고 날개를 펼치고 도약을 한다.

과연 주인공이 백화점 옥상에 올라가 날개를 펼친 것을 도약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내와 그의 암담한 방으로부터 해방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에겐 아내와 어두운 방이 전부였다. 전부인 공간으로부터 시도한 탈출은 어쩌면 사회에 대해 무지한 그가 새로운 것들에 대해 눈을 뜨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인공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였다. 아내 이외에는 대화할 상대가 없었으며 그마저도 잠깐일 뿐이었다. 그리 보면 혼잣말을 되 뇌이던 그의 행동은 고독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고독이란 타인의 부재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과는 다르다. 고독이란 자발적으로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내면적인 자아와 만나고 그 자아와 대화를 나누며 소통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고독은 당당하고 자부심에 넘치는 자아의 능동적인 활동이다’고 한다. 주인공이 느꼈을 고독은 스스로를 고무시키는 일종의 자기계발이었으며 굳이 남들과 소통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다.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삶, 사실 주인공이 추구한 삶은 그런 주체적인 생활이었을 것이다. 아내라는 존재로부터 돈의 유용성을 경험하고 수면제를 먹였던 아내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어쩌면 자신이 먹은 게 수면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으로 품고 결국 도약이라는 실천을 한다.

사람들은 가끔 무엇을 보고 부정적이고 암울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나름대로의 사정과 배경을 이해하려 해 본다면 마냥 참담한 것은 극히 드물기에 시간이 지나면 전보다 성숙해지고 단단해진 자신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바쁨 가운데서 활력을 느끼기에 어쩌면 생각보다 그들은 괜찮을 수도 있다. 긍정과 부정 그 어딘가에서 굳이 정의를 내려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의 불확실한 근거에 의한 결론이 고작 우울이라면 불행은 숱하게 널렸다. 그렇기에 날개에서 주인공의 도약이 그저 백화점 옥상에 뛰어내리는 것으로 결론 지어져서는 안 된다. 동굴로 들어가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침전해 있던 바닥에서 자아를 끄집어 올리듯 긍정의 욕구로 작용한 생기를 외면해선 안 된다.

죽을 만큼 힘들다는 말은 제발 누군가 날 좀 돌아다 봐 달라는 간절한 바람일 수 있다. 널브러진 게 불행이라고 부딪치는 게 암울이라고 치부하기보다 의기소침해진 자아를 살피어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실낱같은 깡을 내야 한다. 지극히 자신을 위한 발로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일 없이 스스로 햇살을 더듬어야 한다. 자신이 돌아보지 않는 스스로를 외면하는 삶이야말로 꺼져버린 아궁이나 같기 때문이다. 미약하지만 꿈틀거리며 희망길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면 시간이 스스로를 받쳐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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