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김순남 어머니

장미, 잃어버린 시절

마당의 장미꽃들이 활짝 피어 올라올 때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 향기가 코끝에 닿으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을 걸어 보곤 한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제대로 피어보지 못했다. 마을회관에 가끔 찾아와 내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어떤 시인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 일본 여자 시인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가 생각난다고 했다.

나는 여순사건과 6·25사변이라는 큰 사건을 겪으며 가장 예뻤을 처녀 시절을 가장 파리하게 보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나의 손과 발은 거칠어졌고 나의 몸은 휘어져 갔다. 겨를이 없는 삶 속에서 어떤 꽃인들 제대로 피워볼 수 있었겠는가!

마당의 장미꽃이 활짝 피어나 향기를 올리면 처녀 적 못다 핀 나의 젊은 날들이 열리는 것만 같다. 나는 꽃향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 어릴 적 저편의 나를 불러 보곤 한다. “순남아, 나가서 놀자. 멋도 부려보고 영화관도 가보고 단팥죽도 사먹자”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 생각지 못한 곳에서 / 파란 하늘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중략)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 (중략)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나는 아주 불행했고 / 나는 아주 바보였고 / 나는 무척 쓸쓸했다 //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한 한 오래 살기로 / 나이 들어서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 블란서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이바라기 노리코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

질곡의 역사 속에서의 소녀시대

며칠 전부터 부쩍 우리 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심각한 얼굴을 한 와이셔츠 차림의 사람들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오면 아버지는 그들과 사랑방에서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당시 아버지는 마을의 이장 일을 보고 있었는데 분명히 뭔가 큰 사건이 터진 것 같았다.

나는 궁금했지만 어른들의 일을 물어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엄마를 도와 집에 온 손님들께 대접할 다과상을 차리거나 식사 준비를 도와야 했으므로 깊게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여수랑 순천에 공산당 군인들이 지서를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였다는구나. 벌써 광양·곡성·구례·벌교·고흥까지 쳐들어왔다고 하니 어디 밖에 나돌아 다니면 안 된다. 나라에서 이들을 잡기위해 군인들을 겁나게 보냈다는구나” 엄마가 부엌에서 상을 차리며 내게 조용히 말했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당시 나는 13살 정도였는데 그 사실을 듣게 되자 당장에라도 공산당이 총을 들고 집에 쳐들어올 것만 같아서 너무 무서웠다. 밤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그들이 우리가족을 잡으러 들어올 것만 같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달달 떨며 날밤을 세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여순사건이라고 불렀다. 여순사건은 정부군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일반 민긴인들의 희생이 많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정부군에게 잡히지 않은 일부 반란군들은 빨치산이 되어 산속에 숨어들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런 역사의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는 날마다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며 그들과 바깥일을 하느라 점점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등한시하셨다. 3남 4녀 중 둘째이자 맏딸인 나는 동생들도 돌봐야 했는데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해야 할 집안일이 많아져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 매일매일 손님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비롯한 허드렛일들을 하며 아버지가 돌보지 못한 농사일까지 맡아서 해야 했다.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일 속에서 나를 비롯한 우리 남매들은 점차 숨이 막혀가기 시작하였다.

우리 집은 광양읍 덕례리에 있었다. 나는 해방 전인 1936년에 태어났다. 여순 사건이 일어난 1948년 10월, 당시의 나는 이념이나 정치 같은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열세 살의 순박한 소녀였다. 그저 아버지나 엄마와 오빠와 동생들과 모두 평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런 나에게 역사의 시간은 가혹하게 흘러갔다. 여순사건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에 6·25동란이라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들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비롯한 많은 남한 땅을 점령했으며 광양까지 내려와 최후의 피난처인 부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 집은 신작로 가에 있었고 그곳은 북한군들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그런 탓에 행군을 하다가 쉬어가야 했던 북한군들은 쉽사리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고 우리 식구들을 괴롭혔다. 북한군들은 낮에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밤에는 부산을 향해 행군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면 다른 부대 소속의 북한군들이 또 우리 집으로 들이 닥쳤다. 이런 날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을 참고 치러내느라 우리가족들은 너무너무 힘이 들었다. 집이 심산유곡이었거나 두메산골이었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가 나의 인생에서 가장 고생했던 시절로 기억된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가난하게 산다 해도 아주 살기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생을 향하여, 한순간처럼 지나온 시간들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나는 중매를 통해 지금 살고 있는 광양의 봉강면 당저마을로 시집을 왔다. 내 나이 21세였으며 남편은 22세로 셋째아들이었다. 남편은 2017년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내가 남편과 결혼하게 된 건 경제적인 것 보다 집안의 가풍이나 내력을 중요시 여긴 부모님의 결정 때문이었다. 남편의 가문이 양반출신으로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중매쟁이의 말에 친정 어르신들은 혼인을 결정하셨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시댁은 여자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나는 친정에서도 많은 일을 하다가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 오니 이곳에서도 날마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댁의 남자들은 선비 정신이 강해 당연히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집안일과 농사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가장 힘든 일은 4마지기 논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달팽이랑 해충들을 잡아내는 일은 고단하였다. 달팽이를 제때 잡아주지 않으면 벼를 갉아 먹어 벼농사를 망치게 된다. 달팽이는 사각사각 벼를 잘도 갉아먹는다.

나는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을 첫 번째로 얻었다. 그래서 아들 못 낳을까봐 걱정하지 않고 살아서 다행이었다. 아들 복이 많아서 인지 아들을 세 명이나 두었다. 그래서 딸을 낳았을 때 너무 기뻤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귀하게 키웠다.

농사를 짓는 일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고 열심히 일했지만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 먹고살고 아이를 가르치기에는 늘 부족했다.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으나 형편상 그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자녀들이 스스로의 삶을 잘 살아내 주어서 고맙다. 아들들은 울산이나 부산 등 멀리에서 살고 있지만 자주 연락하며 나를 걱정해준다. 막내아들과 딸은 광양에 살아서 자주 다녀가고 늘 보살펴준다. 아직 미혼인 딸은 직접 담근 김치를 내게 가져다주고 시장도 봐다 주고 약도 사다 주며 세심하게 다 챙겨준다.

즐거웠던 소소한 기억들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만 하다 보니 내 삶에서 유희를 즐겼거나 했던 일들이 무엇인지 기억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나는 놀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것 같다. 어디를 잘 돌아다니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취미 같은 게 없었다. 살아가는 일이 늘 바쁘고 겨를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녀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잠시였지만 친구들과 다른 친구네 집으로 마실 다녔던 일이 그나마 즐거웠던 일로 떠오른다. 방에 뱅 둘러앉아 수를 놓으며 수다 떠는 일이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다른 놀이는 재미가 없었다.

한 30년 전쯤이었을까? 내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 무렵 동네친목계가 생겼고 나는 친목계원으로 가입했다. 친목계에서는 1년에 한 번 여행을 떠났다. 제주도도 가고 서울 롯데월드, 설악산도 갔다. 멀리 중국에도 갔다. 그중에 롯데월드가 제일 신기하고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나이 먹어 몸이 안 좋아 그나마 여행도 못 간다. 당시 친목계 덕분에 그나마 여행을 다녔던 게 가끔 즐거웠던 기억으로 떠오른다.

묘비명을 생각하는 시간

내 나이의 사람들이 거의 그러했겠지만 내 인생에서 나는 특히 힘든 일을 많이 겪고 일을 많이 하고 산 것 같다. 작년에는 논을 밭으로 일구어내어 과일나무 심었다. 그런데 수확이 너무 좋지 않아 올해 다시 논으로 복구했다. 늦은 나이인데도 아직까지 일이 끊임없다.

이렇게 고단한 생을 살아냈지만 나는 작년에 화가 할머니로 전시회까지 열었다. 마치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마지막 구절 같은 삶을 살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묘비명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 내 소녀는 고단하였으나 오래 살아남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블란서의 루오 할배처럼 –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온 삶이 아름다운 그림 아니겠는가!

글 지도=이미루, 그림 지도=이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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