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 터전의 원도심 주택과 상가의 전통

광양 문화 산책 연재를 시작하며

이번 호부터 광양문화연구회(회장 박두규) 회원 9명이 쓰는 ‘광양 문화 산책’ 연재를 시작한다. 먼저 광양읍 마을문화를 15회 싣고 이어서 중마동, 금호동을 계획한다. 이 3곳은 2020년 한국도서관협회의 지원을 받아 각기 3명이 연구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그 일부를 재구성해서 싣는다. 필자들이 답사하며 살핀 마을단위 문화 자원의 매력을 확인하고 탐방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광양문화연구회는 2017년 『광양, 사람의 향기』를 출판했기에 이번 연재에서는 사람 이야기를 간결하게 했다. 향후 광양읍, 중마동, 금호동의 연구보고서가 책으로 나와서 사람들의 활동까지 함께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편집자 주>

▲ 박두규 광양문화연구회 회장

광양읍은 일제강점기에 읍성이 헐리고 주택과 상가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면서 ‘성 안’ 사람들과 ‘성 밖’ 사람들이 뒤섞이며 새롭게 마을을 확장했다. 읍성 터전 위의 읍내리는 동외와 신흥 두 개 마을이다.

동외(東外)는 동문외촌(東門外村)이라 불리던 읍성의 ‘동문 안팎의 마을’인데, 동문 주변에서 서문 사이에 형성되었다. 신흥(新興)은 읍성 안쪽의 성내촌(城內村)과 남문 밖 남외리(南外里)로 이뤄졌고, 조선말부터 남문 밖에 새로운 시가지가 번창하여 신흥(新興)이라 불리어졌다.

광양역사문화관으로 되기까지

읍내리 중심지의 광양역사문화관. 이곳은 조선시대 6방이 근무하던 작청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광양군청으로 신축했고 1981년 군청이 나간 뒤에 광양읍사무소가 되었다. 2010년에는 읍사무소도 옮겨가게 되어 주변 상인들은 건물을 헐고 주차장을 만들자 했으나 역사적인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의견도 만만찮았다. 다행스럽게 1943년의 건축물은 보존되었고, 당시의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로 인정받아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읍성의 흔적이 자취를 감춰버린 지금, 오랜 역사의 지킴이가 하나 있다. 역사문화관 동쪽에 서 있는 은행나무다. 은행나무 수령이 400년이니 임진왜란 직후부터 성장해서 여름이면 그늘을 내리고 가을이면 노란 잎으로 도심을 장식한다. 역사문화관의 남서쪽 도로변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2018년 3.1절부터 일제강점기의 잘못을 기억하며 아픈 증언을 하고 있다.

광양역사문화관 정문을 들어가면 광양의 역사 홍보관이 마련되었고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며 안내를 한다. 광양시와 읍성 주변을 살피려면 문화관광해설사를 찾아가면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 건물 안쪽의 일부는 광양문화원 사무실이다.

▲ 등록문화재 제444호 광양역사문화관

어느 지역이나 도시가 확장되면서 오랜 역사의 중심지였던 원도심은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읍내리도 예외가 아니다. 1995년 광양시가 통합되어 시청이 중마동으로 옮겨가는 커다란 소용돌이를 겪고 읍사무소도 떠났다. 읍내리 상권은 추락하고 골목 안에는 빈집들이 생겼다.

동외마을 문화 공간과 벽화 골목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광양시 문화도시사업단이 활동을 하면서 ‘읍성 549 아트 프로젝트’를 내걸었다. 읍성의 둘레 549미터를 주제로 담아 원도심에서 문화 활동을 벌인다. 다른 곳으로 옮겨간 사람들의 발길을 어떻게 하면 다시 찾아오게 할 수 있을까, 전국의 원도심마다 씨름하고 있는 어려운 과제다.

먼저 ‘읍성549 문화 공간’이 있다. 읍내리에 비어 있는 건물 네 곳을 손질하여 역사 문화 자원을 재해석하고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공간이 되도록 했다. 2018년부터 스토리하우스, 빈터, 549갤러리, 광양사진관 등 4개의 공간을 조성하여 문화 예술계에 위탁 운영을 한다.

▲ 정채봉과 친구들 벽화와 골목

다음으로 ‘정채봉과 친구들 문학테마길’이다. 광양역사문화관 옆 골목을 문학 테마 길로 정하고 벽면에 8개의 작품을 설치했다. 읍성 터의 정체성을 시각 예술로 표현하여 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을회관 벽면에 정채봉의 얼굴을 두드러지게 하고 친구들까지 그린 것은 그들의 학창 시절을 기억하면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신흥마을 골목의 새로운 모색

조선시대 읍성에서 현감이 4인교를 타고 남문을 나와 조련장까지 가던 골목길은 제법 넓었다. 그래서 ‘큰길’이나 ‘큰골목’ 또는 ‘원님길’이라고 했다. 제일주유소 옆에서부터 남북으로 가로지른 큰골목 주변은 인서리, 큰골목의 동쪽은 인동리, 서쪽은 신흥마을이다.

광양역사문화관 앞 도로 남쪽부터 신흥마을인데, 한 구간을 지나 가마솥국밥 네거리 주변으로 형성된 상가를 제외하고 단독주택이 남쪽으로 이어진다. 남부한옥과 개량한옥 그리고 현대식 주택들이다. 이곳 한옥 마당에는 감나무나 정원수들이 줄지어 섰거나 텃밭을 끼고 가지런히 모아놓은 장독대와 우물이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옛 정취를 더해준다.

요 몇 년 사이 광양읍은 도시재생 사업으로 골목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원님길 안쪽에 있는 창고와 한옥 3채를 개조해서 주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사용할 계획을 하며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또한, 상설시장 남쪽 읍내리 316번지와 386번지 골목의 빈 창고를 재건축해서 전시장, 영화관, 다목적실을 갖춘 문화창고로서 시민들이 추억을 회상하며 지역문화를 펼쳐갈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단다.

신흥마을 부자집을 ‘불탄집’이라 불렀다. 광양식물자원연구회 이평재(73) 회장의 할아버지(이문화) 집인데 1948년 여순사건 때 14연대 군인들이 본부로 썼고, 그들이 백운산으로 가면서 본채를 불태우고 아래채만 남아서 ‘불탄집’이라 했다. 서울에 사는 후손이 그 집을 단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신흥마을 회관은 광양읍의 마을 중에서 유일하게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 안에 있다. 이곳도 도시재생 골목 정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자동차가 접근하지 않는 골목만의 깊은 정취가 잘 살려지기를 바란다.

▲ 신흥마을 회관 옆 골목

골목의 생활사 자원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발굴과 보존 방법을 병행해 나가면 좋겠다. 오랜 삶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골목길이나 전통시장은 거친 문명에 대응할 수 있는 광양읍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이 쓸모없는 것인 양 무조건 허물기보다는 가급적 보존하면서 현대인들의 삶을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도시재생 사업이기를 바란다.

전통 상가의 손맛과 추억 거리

읍성 시절 동헌의 서쪽 통인청 자리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 지금의 상설시장이다. 남문 부근 골목의 저자도 1964년 이곳에 합류시켰다. 목성리로 분리해 나간 5일 장터와 교류하고 보완하며 존립한다. 광양시에서 2021년 설날이 지나면 상설시장 장옥을 신축하기 위해 철거를 계획하고 있다.

장옥과 주변 상가를 포함한 56명으로 구성된 상설시장상인회 최병삼(55) 사무국장은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를 챙긴다. 장옥 시설을 신축하여 재배치하기까지 시청과 협의하며 타결해야 할 것이고, 어떻게 다시 고객의 발길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인지 걱정하며.

상설시장의 가게 중에는 전통의 맛으로 이름난 가게들이 여럿이다. 명절 때면 떡집과 생선 배대기 가게 앞에는 30미터 정도 줄을 서고 인터넷 판매망을 활용하기도 한다.

광양숯불구이를 널리 퍼뜨린 대중식당은 상설시장 틈새에서 70여 년 동안 3대째 운영하는데, 광양등기소가 이전을 하고 주차장이 설치된 곳으로 출입로를 내었다.

대한식당과 장원식당도 2대째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가는 숯불구이 전문점이다.

‘원조 광양 기정떡집’은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박용기(63) 씨가 아들에게 3대째 대물림하며 ‘광양 기정떡’의 맛과 명성을 이어간다.

이렇게 동외마을의 상설시장 주변은 먹거리를 중심한 손맛을 자랑한다. 이와 달리 역사문화관 건너편 신흥마을의 상권은 숱한 변화를 겪고 있다.

농협중앙회 광양시지부’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관공서이며, 군청이 있던 시절부터 도장을 파던 정인당과 희경당은 여전히 그 모습을 지키고 있다. 중앙사진관은 50년 동안 사진기의 매력에 빠진 아버지와 아들이 운영한다. 십자당약국에서 빠리바께뜨 사이는 패션 거리를 지키려 애를 쓴다.

가마솥국밥은 여수에 분점을 낼 정도로 성업이고 그와 나란히 왕창국밥 집이 있다.

숯불구이 전문점 경도식당의 이용길(76) 씨는 남문에 가까운 집 주변 공사를 할 때 가로세로가 1미터 정도의 청쑥돌이 많이 나왔고, 총포를 내놓도록 둥그렇게 가운데가 파인 돌들도 있었다고 한다. 성을 쌓았던 돌들이 든든하게 기초가 되어 있는 읍내리다.

글=박두규 광양문화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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