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문화 예술의 중심

교촌이 품은 옛 향기

광양교육청 우측 향교로 향하는 골목길 양쪽 담벼락에는 마을의 역사를 이야기하듯 나란히 그려진 벽화들이 반긴다. 가지런한 장독대와 흰 두건을 쓰고 빨래하는 아낙들, 고목에 핀 매화와 여러 꽃들, 농악단을 이끄는 용이 그려진 큰 덕석기(農旗)와 벽화 옆으로 깨끗한 공동우물과 두레박이 친근한 얼굴을 내민다. 마을 앞뒤 옆으로 교육청, 향교, 문예회관과 중앙도서관, 길 건너 광양중학교와 하이텍고등학교, 그 옆으로 최산두, 박세후 현감을 배향하는 봉양사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교육과 문화예술에 관련된 시설이 모두 모여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속에서 이균영 소설가, 정채봉 동화작가 등 문학의 대가들까지 나왔음을 알 수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지역 문화예술의 터전임이 분명하다.

▲ 교촌마을

교촌이란 곧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교촌마을은 원래 우장면(牛藏面)에 속했고 우장리에서 다시 교촌리로 바뀌었다. 우장면 교촌마을은 원래 소(牛)가 새끼를 품고 있는 형국이라 명명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마을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호구총수(1789년)에 우장면 교촌이라 기록돼 있다.

교촌마을은 예로부터 소리와 농악이 유명했다. 특히 상여를 멜 때 부르는 ‘오채소리’가 전해오고 있으며 덕석기를 앞세운 농악은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북 놀이고 다른 하나는 김매기 농악인데 김매기가 끝나면 많은 농군이 농악대로 변하여 마을 상호간 접전이 벌어지곤 했다. 교촌마을 농악은 광양을 대표하는 농악대였지만 지금은 그 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거친 세월을 지나온 향교

향교는 입구의 하마비에서부터 홍살문, 풍화루를 거쳐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뒤뜰의 500 년을 훌쩍 넘은 은행나무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호흡하며 듬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향교를 둘러싼 긴 돌담에서부터 뒷산의 나지막한 능선을 두른 우산공원이 오랫동안 향교를 품고 있고 울창한 숲이 지금도 향교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 광양향교

풍화루 옆으로는 향교를 중창하거나 교육 진흥에 도움을 주었던 역대 현감 군수 시장 전교의 공적을 기리는 선정비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재임 기간의 공적을 서로 자랑하듯 흥학비, 불망비, 공적비 등의 내용을 담은 큰 비석들이 8개나 되었다. 국회의원, 시장을 지냈던 분들의 공적비도 함께 있었다. 이들은 최근에 세워진 듯 표면이 매끈했고 긴 세월을 담고 있는 비석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공적비를 세우는 것 자체가 과거 왕조시대의 산물이었다면 요즘은 단순히 기록의 의미로 크기가 작아졌으면 좋을 듯하다.

예(禮)와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적인 풍습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지만 행함에 있어 종종 권위적이고 형식적이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그 근간을 이루는 향교는 그동안 교육은 물론 지역민의 정신문화를 보급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오래도록 보존하고 살찌어왔다. 그러나 점차 유교 문화가 쇠퇴하고 일상생활이 서구화되면서 향교는 문명의 뒤편으로 꼭꼭 숨어버렸다.

향교의 구성

향교의 건물과 시설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저마다 당부하듯 때로는 경고하듯 문자나 조형물로 또는 독특한 색상으로 표현해 놓고 있다. 그들 앞에 서면 그 의미가 생생한 목소리로 전해오는 듯하다. 입구에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하마비인데 좌측과 우측 앞면에 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좌측은 최근에 새롭게 제작된 비이며 우측 하마비 뒷면에는 숭정 9년 5월에 有司 김여람 정오문 서상설이 세웠다고 쓰여있다. 숭정은 명나라 연호인데 1636년에 해당된다. 이는 비록 작지만 향교의 시설물 가운데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좌 우측 하마비의 색깔과 마모 상태를 비교하면서 새것과 오래된 것의 차이를 가늠해보라는 재치 있는 발상인 듯하다.

▲ 광양향교

홍살문은 붉은 화살문이라는 뜻인데 신성한 곳을 의미하기도 하고 역병이나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한다는 뜻의 풍화루에는 세 개의 큰 문이 있는데 좌 우측 문은 일반들이 출입을 구분하는 문이고 가운데 문은 영혼이 출입하는 문이다. 출입문 하나에도 영혼을 배려하는 뜻이 담겨있다. 향교 출입문에서부터 각 건물 사이에는 많은 계단이 있는데 이 또한 하나하나 열과 성을 다해 성현의 뜻을 받들고 학문에 힘써 단계를 밟고 올라간다는 향교의 이념을 표현해주고 있다.

향교 내에는 공자의 신위를 모시는 대성전이 가장 눈에 띄는 데 대성전은 규모와 외관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은 넓은 대청과 온돌이 배치되어있고 명륜당 앞 동쪽과 서쪽에는 학생들이 기숙하는 동재(양반 자제들의 숙소) 서재(평민 자제들의 숙소)로 구분된다.

▲ 광양향교 하마비

1946년에는 광양중학교가 설립되면서 107명에 이르는 많은 학생이 광양향교의 명륜당을 임시 학사로 사용했다. 학교 건물이 신축 중인 상황이라 당시에는 명륜당과 옆 건물에서 두 개의 반으로 나누어 학교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광양향교는 1985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11호로 지정됐고 대성전에서는 봄 가을 두차례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고 있고 명륜당에서는 유림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는 5개 과를 두어 한시 작법과 서예, 한문, 논어 해설, 생활예절 등을 가르친다.

향교 사무국장 이광호(68) 씨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향교가 유교의 딱딱한 틀에서 벗어나 시민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향교의 전통을 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시민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 향교의 넓은 공간의 활용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 중이다. 새롭게 요리강좌를 개설한다거나 인성교육을 개발하고 향교 내 백일장대회 또는 시화전, 연주회 등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며 그동안의 고민을 토로한다

향교의 새로운 변신을 기대하며

향교 뒤로는 52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비롯해 동백나무 금목서 은목서 등 묵직한 세월을 안고 있는 나무들로 숲을 이룬다.

향교 내의 작은 계단과 길 사이로 나무들의 나이와 오래된 건물 현판의 의미를 헤아리며 둘러보는 것도 흥미롭고 고목 아래에 앉아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도 있어 상쾌하다.

때마침 동재의 열린 문 사이로 국악을 배우는 여인들의 청아한 소리가 맑은 하늘에 울려 퍼졌다. 향교 안에서 울리는 예상치 못했던 노랫소리라 처음에는 조금 생경했지만 이내 마음이 훈훈해지고 가벼워지는 것은 아직도 우리 정서의 뿌리가 분명 그곳에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향교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를 안고 있는 옛 건물이며 현실 생활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져 있는 듯하다. 비록 실생활에 잘 쓰이지는 않지만 되돌아보면 인간이 거쳐온 거친 삶의 흔적들이 완고하게 뿌리 내려 있다.

그런 점이 오히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고 차분하게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장소로서 긍정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보다는 유교 문화의 전통적인 엄숙한 분위기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주장과 과감하게 현실과 융합해야 한다는 새로운 의견들이 교차한다.

향교는 일반 대중이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아직 문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더 열린 마음으로 굳게 닫힌 문에 조금씩 틈을 내기 시작하면 언젠가 풍화루의 큰 대문도 활짝 열리고 향교는 시민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항일독립운동 비석군과 봉양사

교육청을 마주하고 있는 유림회관 앞에는 한 말의 문장가로서 ‘매천야록’을 집필했고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순국했던 매천 황현을 기리기 위한 ‘황매천추모비’, 광양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황병학의 기념비, 3.1운동 때 광양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5명의 애국지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6년 광양향교에서 주관하여 세운 ‘오의사기념비’가 함께 서 있다. 그 맞은 편에는 소여물통이라 불리는 조산(槽山) 낮은 언덕에 봉양사가 있다.

선조 11년인 1578년 광양 현감이었던 정숙남이 최산두의 학덕과 절개를 숭모해 봉양사를 세웠으며 당시 이곳에 있는 경행루(景行樓)에서 사림파들이 숙식을 하며 교육을 받기도 했는데 그 때에는 신재서원으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내우마을과 이균영 생가

‘시목은 가막재 마루에서 우산쟁이(牛山亭)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우산쟁이 위에는 밤이 내려와 있어 마을의 집들, 집들 사이의 길, 새마을 회관으로 변한 동청(洞廳), 마을의 감나무들, 은행나무들, 마을 뒤를 싸고 있는 대나무와 동백숲,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은 보이지 않았다. 달포 전 중추절을 보낸 구름 없는 하늘 한 끝에서 반쪽 달이 봉긋이 솟아오르자 하늘을 향한 나뭇가지들에 엉켜있던 어둠 떨기들이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오랜만에 대하는 고향마을은 차고 맑고 숙적(肅寂)하였다. ’(이균영의 ‘노자와 장자의 나라’에서)

▲ 내우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나무

내우마을은 작가의 작품 속에서 그렇게 표현되고 있다. 내우마을은 마을이 산 안에 있고 지형이 소의 몸체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내우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교촌마을과 맞닿아있는 마을 입구에는 선명한 내우마을 표지석 옆으로 300여 년 된 당산나무인 팽나무 4그루가 펼친 가지와 잎들이 하늘에서 자유롭다. 산비탈에 들어찬 집들과 야트막한 높이에 있는 마을 회관은 지킴이처럼 서 있는 든든한 팽나무들로 인해 한결 아늑해 보인다.

팽나무 아래에서 만난 마을 이장인 박재웅씨는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린다.
팽나무 가운데 수령이 300 여 년 된 팽나무는 맏형격의 당산나무인데 앞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었고 그 양쪽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장승이 있었다 한다.

여제단은 옛날 자연숭배 일원으로 일, 월, 성, 신, 산천에 신이 있는 것으로 믿어 제단을 만들었고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는데 어느 해 다른 종교를 가진 마을 이장이 이를 미신 행위라며 제단과 장승을 모두 철거해버렸다.

우산 우측으로 논밭이 넓고 산을 감싸 안은 마을이 안온했는데 남해고속도로가 나면서 조용했던 마을에 소음이 생겨나고 마을을 갈라놓았다며 애석해했다.

우산으로 오르는 골목 사이로 작은 집들이 마주보며 늘어서 있다.

길 안쪽에는 소설가였던 이균영 생가가 있는데 대문 옆으로 길게 이어진 담장에는 꽃과 담쟁이가 힘차게 담을 넘고 있었다.

대문에는 아직도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이용표와 지금도 살아계신 어머니 김계순(95)의 명패가 걸려있다.

주동후, 정채봉, 이균영의 이야기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주동후는 대학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정채봉과 중학생이었던 이균영을 우산공원 도토리나무 숲이나 인동숲거리 도치바구, 유당공원,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습작을 시키곤 했다. 정채봉은 항해사가 꿈이었지만 김승옥,주동후,강호무 등의 지역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되길 결심했고 이균영은 처음엔 법관이 목표였지만 정채봉을 만나면서 글을 쓰기로 진로를 바꾸었다.

주동후는 1964년에는 정채봉(광양농고 2학년) 이균영(광양중 2학년) 2인 시화전을 제일극장에서 열어주는 열정을 보였다. 당시 광양시청에 근무했던 소설가 안영씨도 새싹 같은 후배들의 시화전에 참석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주동후 작가가 후배들을 위해 큰 정성을 기울인 것은 후배에 대한 사랑과 그들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의 고유한 풍토와 정서가 빛을 발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의 열정적인 가르침과 사랑으로 정채봉은 한국 최고의 동화작가로 등단했고 이균영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성장했다. 이균영은 1984년 단편소설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당시 최고상인 이상문학상을 1993 년 ‘신간회 연구’를 통해 단재학술상을 받았다. 이균영은 당시 최연소 나이로 창작집 한 권 낸 적 없는 작가가 문학상을 받는 두 가지의 기록을 세우며 한국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96년 막내였던 이균영이 제일 먼저 교통사고로 떠나고 2001 년 다시 정채봉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주동후는 몹시 괴로워했으며 그 역시 2003 년 세상을 떠나버렸다.

신기루처럼 솟아났다 어느 날 홀연히 떠난 이들의 이야기는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도 같은 아픔을 남겼다. 한국 문단에서 그들만의 확고한 위치를 점유했던 이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우마을 골목 안쪽 이균영의 생가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고 집 안에는 지금도 정채봉과 함께 문학가의 꿈을 키웠던 사랑방이 어릴적 쌔근거리던 그들의 숨결처럼 남아있다.

▲ 이균영 생가 뒤편에 마련된 이균영 문학비

이균영은 가족, 도시에 관한 소설은 물론 치밀한 역사적 고증이 뒷받침된 고향에 관련된 역사소설을 즐겨 썼고 장차 백운산을 중심으로 한 광활한 스케일의 대하소설을 꿈꾸어왔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가족사는 물론 광양지역의 흘러온 역사와 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비록 짧은 세월을 살다 갔지만 그가 생전에 남긴 글을 읽어 보면 매우 깊이 있고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단재 학술상을 받았던 ‘신간회 연구’를 쓰기를 결심했던 것도 광양에서도 신간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그의 외조부가 실제로 오랜 기간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영향을 받았다. 그의 논문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단체였던 신간회의 실체를 좌우익에 치우치지 않고 사실에 근거해서 밝히는 최초의 연구서로서 인정받았다. 그는 신간회를 쓰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회원들을 찾아내며 직접 만나 취재를 하는 등 열의를 보이며 쓴 글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최근 이균영 생가 뒤편에 이균영 문학비가 세워졌고 아담한 소공원이 마련되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낙후된 지역 예술문화를 활성화하기에는 매우 좋은 시도이기도 하다.
앞으로 우산공원 전체가 광양지역의 역사와 문학을 담는 공원이 되어도 좋을 듯하다.

군데 군데 지역의 역사를 소개하고 작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콘텐츠가 있는 공원으로 변모해갔으면 한다. 이균영은 무엇보다 역사와 문학에서 정상 반열에 올랐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산책이나 소풍을 나오는 사람들이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장소, 또는 작품 속의 훌륭한 문구나 역사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가볍게 음미할 수 있으면 좋겠다. 또 광양 출신의 작가들의 여러 작품도 함께하여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거나 움츠려있던 광양의 굴곡진 역사가 곱게 펴지고 문학의 향기가 지역 곳곳에 깊이 스며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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