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 아래 - 김해화

가을 하늘 아래

김해화

3층 슬라브 철근을 메어올리다
잠시 숨을 돌리는 담배 한대 참
노부리 난간에 기대고 먼 산을 보면
거두어들일 것도 없는데 저렇게 와버린 가을

지친 가슴엔 찬바람 일어도
눈감으면 아직도 고향이 보인다.
시릿등 오르는 길 우뚝 선 감나무
감나무 꼭대기에 하늘보다 더 높이 깐치밥 하나
종일토록 감나무에 매달려 전짓대로 감을 따면
시앙판 떨어져 깨진 감 한 소쿠리로 남던 나의 노동
감은 월해수 감이 젤로 맛있어야!
머리 허연 할머니 드리고 싶은 홍시감 하나
꼭대기에 더 남기면
깐치밥은 하나만 둬라. 뒷짐 진 강동양반.
깨진 빠무래기 골라 선반 위에 놓으시던 할머니
깐치밥은 따묵는 것 아니여!
가을이 가고 할머니 가시고
겨울이 오도록 저녁노을 속으로 번져들어가던
감나무 꼭대기에 깐치밥 하나

내 나이 열세살 때
감나무 한번 오르지 않고도
시앙판이면 소달구지로 감을 실어가던 강동양반
지금은 내 나이 서른셋
철근 한번 메지 않고도
간조 때면 우리 노임보다 열 배 스무 배 돈을 챙기는 오야지
그 뒤에 버티고 선 하청회사 백사장
우리들 허물어지는 몸뚱이 서로 의지해 묶어가며
피투성이 꿈 보듬고 숨가쁜 노동으로
15층 근근이 오르고 나면
호화로운 사무실 안락의자에 앉아
아파트 잘도 팔아먹는 건설회사 사장

뭔놈의 감을 요로케 많이 널찌냐?
호통소리에 내려다보는 세상
강동양반 앞에 엎드린 땅의 뒷잔등만 보였지.
일 안허고 하루종일 앉었을래?
지금은 오야지 호통소리에 내려다보는 세상
아아 그러나 저것 좀 보아
핏불 불거지며 이 악물며
눈 부릅뜨며 일어서는 땅. 함께
일어서는 철근. 창끝처럼 칼날처럼
가을 하늘 아래 저렇게 눈부신 서슬

※ 시인 김해화

1957년 전남 승주 출생

1984년 실천문학사 시 <비닐을 걷어내며> 발표

1986년 첫 시집 <인부수첩> 외 다수

건설현장 철근공

20여년 전 어느 해인가 화순 운주사에서 그와 기울였던 막걸리 생각이 잠시 스쳐 간다. 당시 누운 와불을 곁에서 건네준 시집 <누워서 부르는 사랑노래> 속지에 쓴 그의 자필을 보니 2001년 입춘이다. 천천히 막걸리를 들이키는 그를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궁금했다. 독기를 품은 시와는 달리 눈이 선한 사람이었다.

시인 김해화는 초졸이고, 40년을 철근노동자로 살아가는 시인이다. 시든 사진이든 역사든 그림자 세력의 음모든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우고 파고들고 공부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삶은 가난했다.

오죽하면 적어도 중학교를 졸업하던 시절에 태어났으면서도 고향땅 승주 주암면에서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차가운 세상에 내던져진 가난한 노동자다. 그러면서 기어이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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