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서산 코재를 오르고 내려, 웅방산 다시 올라 남해를 건너다본다. 어느새 땀은 1월의 꽃 추위와 정담을 나누고 엉덩이란 놈은 깨춤을 춘다. 다리는 나 모르는 사이 축지법을 익혔나 가볍고 상쾌하다. 두 손은 쉬지 말고 가자며 학의 날갯짓을 한다. 낙엽은 떠나감을 이야기하는데 하얀 눈이불속 매실 꽃눈은 아직도 청춘이라며 격려의 추임새를 보낸다. 저 멀리 사람 사는 세상이 멀고도 작구나.

날씨가 너무 추워 산행 친구들이 뜸한 아침, 산뜻하고 벅찬 기운이 온몸에 넘쳐흐른다. 이제 산행은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일상의 습관이 되었다. 이 소중함에 내가 묶여 가는 것이냐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이냐!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제 낙엽을 밞으며 눈꽃을 보고 나면 어느 샌가 양지바른 길섶에는 앙증맞은 별꽃과 제비꽃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참꽃과 개 꽃이 순서 지켜 피고, 산 벗 까지 구색을 맞추고 나면 꿩은 새끼들과 나들이를 하고 살짝 자랑을 한 후 타박 솔 밑으로 숨고. 싱그러운 잎들은 가을이 왔음을 알고 고운 단풍잎으로 갈아입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한해가 지나갈 것이다. 역사든 문학이든 글이 품은 뜻은 개별 단어의 의미 못지않게 문맥의 의미를 파악함이 소중하듯 이런 풍광들의 변화와 반복 속에 숨겨진 자연의 문맥은 무엇일까. 내가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새로워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일생을 여행으로 보내며 『산티아고 가는 길』을 쓴 세계 3대 여행 작가 세스 노터봄은 “나에게 여행은 질러가는 길이 아니라 둘러가는 길”이라며 “그런 과정을 통해 여행은 내가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라고 말했다. 반복되는 여행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초월을 배우고 죽음과 이별을 극복하는 문학적 경지까지 이야기 한다.

벗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얼굴 한번 보여주고 잘살고 있는지 신고를 하란다. 코로나의 위험 속에 비대면의 예방수칙에도 외롭고 그리워서 삼삼사사 모인, 마스크에 가려진 반쪽의 얼굴들이 그래도 반갑다 인사를 나누며 주먹 악수를 한다. 퇴직을 한 후 자주 만나 같이 소일하는 벗들과의 습관은 저마다 차이는 있지만 제2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도 같다. 지인의 소식들을 전하고 받으며 지역 관심사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보면 피해야 한다면서도 정치나 종교, 당면 이슈화된 경제 사회 문제로 의견을 나눈다. 대화로는 부족함을 느끼며 때론 오락으로 제2의 언어를 주고받고, 식사 여행으로 우의를 다지며 활력을 채운다. 술잔을 나누다 흥이 오르면 노래방에도 들리면서 그렇게 또 하루가 간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건강과 취향과 정체성이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유별난 나의 일상 때문일까, 지인들과 모임에서 요즘 주고받는 언어와 관심사와 논쟁에서 거리감을 느낄 때가 있다. 산행으로 자연과 접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서재에 칩거하며 일상과 거리감이 있는 고전이나 다양한 주장의 책들과 시간을 보내는 이유일 것이다.

코로나 때문일까. 나의 일상이 된 산행과 독서와 글쓰기는 지적 호기심으로 삶을 풍요롭게 해 고독을 잊게 하고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노년의 몸을 추수려 준다. 지속적인 자기반성의 사유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선한 마음을 길러도 준다. “삶은 일과 땀의 소중함을 체험해가는 것”으로는 부족함이 없을까. “원숙함이란 재능 따위가 아니라 시간이 가르쳐주는 미덕이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노터봄이 말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가고 있는지, 익숙함에 젖고 즐거움에 취하여 “참된 재미는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나 인식의 확장에 있다”라는 말에 반하여 새로움을 찾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마음을 다잡아본다.

무엇보다도 노쇠에 당당히 맞서보겠다며 2년이 다 돼가는 체력 단련은 현명한 결정인지도 되짚어 본다. 추월을 거의 당해보지 않았는데 젊은 친구들이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며 앞장서 간다. 그렇게 아침마다 몸풀기 운동을 하고 산행을 꾸준히 해도 서산 코 재를 오늘 때는 여전히 호흡이 버겁다. 서산을 꾸준히 오르는 나이 든 사람은 나와 같은 나이의 세 사람이 유일하다는 사실로 위로받아야 할까.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집사람의 충고에 신경도 쓰인다. 나름대로 예비운동과 정리운동을 하지만 관절이 얼마나 버티어 줄지도 걱정이 된다. 중고차 살 때 주행거리 보고 산다며 하루 30여 분 걷기면 족하다는 벗들의 충고도 고맙게 다가온다.

달력을 얻으러 들린 옛날 근무했던 사무실에서 여직원이 ‘지부장님은 퇴직 후 시간이 엄 춘 것 같다’는 말에 속없는 노욕은 집을 나설 때 다리에 힘이 느껴지고 가벼웠다는 사실까지 끄집어낸다. 무슨 재주로 모든 지고 지선을 넘보랴. 부족함을 긍정하는 자세와 꾸준한 노력으로 메우며 내 몫 만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면서 때론 세차를 하고 정기검진을 받듯 나에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느껴도 보고, 익숙해지기와 새로움을 찾는 균형도 생각하며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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