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박희자 어머니

코스모스 같던 시절, 자子 씨스터즈의 모험

한 무리의 코스모스가 앞 다투어 피어나는 가을 서천강가를 바라보면 하늘하늘 했던 소녀시절 어울려 놀았던 소꿉친구들이 생각난다. 경자, 순자, 미자 등등 대부분 이름 끝에 자자子字가 들어가 있었다. 이름에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남아있어서 여자아이 이름 끝에는 子자가 많이 들어가 있었다. 내 이름도 희자가 아닌가!

내가 어렸을 때는 딸이 있는 집들은 딸들에게 멀리 놀러 다니는 것을 잘 허락하지 않았다. 옆 마을로의 외출조차도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주로 집안에 머물며 형제자매들과 놀았지만 가끔은 子자가 들어간 친구들 집으로 마실을 다녔다. 마실 가서 하는 일은 주로 빙 둘러 앉아 십자수를 놓으며 수다를 떠는 일이었다.

이렇게 얌전히 지냈던 내게도 말로만 듣던 가설극장이나 서커스 이야기가 들려 왔다. 상상이 가지 않아 더욱 궁금했다. 하얀 광목천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영화나 어린소녀와 코끼리가 재주를 넘는다는 서커스는 생각만으로도 나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며 들뜨게 하였다.

어느 날이었다. 동네를 쩌렁 쩌렁 울리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읍내에 가설극장이 들어왔으니 영화를 보러오라고는 광고차였다. 나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너무 보러가고 싶지만 부모님께 말해 봤자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게 분명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를 포함한 동네 친구들인 子자매(子 시스터즈)이 똘똘 뭉쳤다. 우리는 부모님들 몰래 영화를 보기러 가기로 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화라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네친구 집으로 마실을 다녀오겠다며 우리는 각자의 집에다 거짓말하고 집을 나섰다.

읍내에 다다르자 커다란 천막이 보였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전구가 달린 게시판에는 영화포스터가 붙어있었는데 포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분되었다. 가설극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있었고 확성기에서는 유행가가 흐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봐 우리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극장 안은 어두웠고 시끄러웠다. 영화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날 본 영화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배우들이 너무 잘생기고 아름다웠다. 내용이 너무 슬퍼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가슴에 한 아름의 아름다운 감동을 안고 집으로 돌아 왔으나 어찌 알았는지 부모님은 모든 정황을 알고 계셨고 화가 많이 나있었다. 한없이 자애로우신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근데 참 이상했다, 부모님의 꾸중이 하나도 노엽거나 무섭지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무서워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리고는 했을 텐데... 거짓말한 잘못이 커서 그랬겠지만 그것보다는 영화의 여운과 감동에 취한 행복감이 너무 컸으므로 꾸중 듣는 그 순간에도 별로 서럽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렇게 시도한 그때의 일탈은 지금껏 내 가슴속에서 콩콩 거리는 심장으로 남아있다.

결혼, 그 현실 속에서

나는 1948년생 광양 봉강면 하봉마을에서 3남 4녀 중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데려간다는 며느릿감 일순위인 셋째 딸로 태어났다. 22세가 되던 해에 중매를 통해 23세인 남편과 혼인하였는데 시댁은 봉강 당저마을이었다.

시 할아버님은 마을 서당의 훈장님이셨다. 훈장님 집안인 만큼 다른 집안보다 선비정신이 강했으며 학자의 풍모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우리부모님은 점잖은 학자집안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 중매가 들어왔을 때 흔쾌히 혼인을 허락하셨다고 한다.

집안의 이런 분위기는 남편에게도 이어졌다. 남편은 한문공부를 하며 유학서적을 많이 읽고 자랐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선비의 풍모가 몸에 배어있었다. 좋은 점도 있었지만 너무 과묵한 남편은 꼭 해야 할 말만하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부부간의 대화가 거의 없었고 나는 늘 쓸쓸하고 아쉬웠다.

나는 딸 셋을 연거푸 낳았다. 아들을 못 낳아서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었는데 네 번째로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 부녀자의 칠거지악 중 하나라고 여겼던 시절이었으니 나도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에 그간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날이었다.

아이들도 많아지자 살림의 규모도 커져갔다. 소규모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었는데 광양에 제철소가 생기자 남편이 그곳에 취업을 했다. 월급이 정기적으로 들어오자 생활에 숨통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유교적 사상이 강했던 남편에게 회사 생활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았다. 10년쯤 다니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회사를 다니기 싫다며 사표를 쓰고 나온 것이다. 아이들 학비가 한창 들어가던 시기였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두자 나는 집에서 농사짓는 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구였던가? 소시 적에 가설극장에도 갔다 왔던 사람 아닌가? 나는 아이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허드렛일과 잡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집에 오면 살림도 해야 하는 고단한 날들이 지속되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며 힘들게 일하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해주었다. 아이들이 고맙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처음 영화를 본 그때의 감정처럼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중년이 된 아이들은 여전히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오히려 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기억의 단편들

평범하게 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면 나이를 먹은 것이라고 한다. 살다보면 즐거웠던 기억이나 힘들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크게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내 생애에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하나 있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우리 집에 아들 친구들이 놀러 왔었다. 밤이 되자 한 아이가 집에 가야한다고 해서 아들은 남편의 오토바이 타고 친구를 데려다 주러 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여전히 집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한 참 만에 소식이 왔다.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아들도 친구도 조금 다쳤지만 다행히 경미한 사고로 큰일은 없었다. 그러나 아들 뒤에 타고 있었던 친구의 부모가 이것저것을 요구하며 자꾸 괴롭게 했다. 그 기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힘들다. 지금까지의 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잘 자라주었고 지금은 청주에 터를 잡고 잘 살고 있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도 있다. 값비싼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도 더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아마 아들을 낳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을 거다. 바로 아이들 대학졸업식에 참석했던 순간인데 어렵게 가르쳐서 그랬는지 보람이 남달리 컸다. 가족모두 한자리에 모여 축하해주고 기뻐하고 마음을 나누었던 자리였다. 기쁨과 보람을 동시에 느낀 순간이었다.

묘비명을 생각하는 시간

광양제철을 그만둔 남편은 벼농사와 매실 농사를 조금 지었고 여전히 무뚝뚝했다. 그는 작년에 조용히 내 곁을 떠나 영원한 여행을 갔다.

“하늘 위를 걷는 듯/ 흰구름은 떠가고 바람은 불고/ 가슴속에 떠오르는 옛풍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 펼쳐지누나/ 거기 네가 있던 그 자리/ 눈물을 두고 간 자리/ 코스모스 활짝 폈구나” <김을현 시, 누워서 하늘을 보면>

나는 내가 코스모스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코스모스 무리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며 영화와 서커스를 보고 싶었던 호기심 많은 소녀였다

- 영화배우가 될 수도 있었을까
나는 코스모스처럼 한들거리며 더불어 살아갔다.-

코스모스가 홀로 피어있는 것이 드물 듯 내 곁에는 당저마을의 친구들이 무리지은 코스모스처럼 옹기종기 모여 산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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