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의 옛 중심지-자연마을과 공동주택이 어울려 용트림

1. 관동마을

관동마을과 와룡마을을 합하여 용두리라 한다. 관동마을은 마로현이 설치되었을 때 관청의 벼슬아치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하여 관동(冠洞)이라 했을 것이라고도 하고, 마을 앞에 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관동이라 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현재 갓바구는 유실되고 없다.

마을 앞 남해고속도로 다리 근처에 용두리라고 씌어 있는 작은 입석이 보인다. 관동리 당산나무와 마을 쉼터, 마을회관이 모여 있다. 감탄사가 나올 만큼 기골이 장대한 당산나무는 수종이 왕버들이다. 1982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이 300여 년이라고 씌어 있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보면 한 그루인 것 같고, 가까이서 보면 세 그루로도 보인다.

당산나무가 서 있는 이곳은 작은 삼거리가 연이어 있는 곳이다. 창덕, 송보, 오네뜨 아파트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차들이 중마동, 광양읍, 순천 등지로 이동하는 길목이다. 게다가 남해고속도로까지 지나고 있으니 교통 소음과 먼지가 아주 많은 곳이다. 이 노거수는 푸른 이끼와 버섯을 피우고도 아직은 잔가지가 무성한 것이 석양빛에 늠름하다.

▲ 관동마을 당산나무인 왕버드나무

김인자(80세) 씨는 옥룡 대방마을에서 스물한 살에 이곳으로 시집와서 ’이태꼴로‘(여지껏) 살았다. 고속도로가 들어서기 전에는 고속도로 다리 부근에 큰 내가 흘렀다. 그 냇물과 옥룡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져 바다로 흘러갔는데, 그 큰 내를 메우다 보니 지금의 황토벽돌 자리에 있던 沼도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관동유적지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었다. 대규모 취락유적과 석곽묘, 민묘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관동 3호 주거지에서 母子曲玉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2. 와룡마을

마로산의 앞자락에 자리 잡은 와룡마을은 원래 ‘구시골’이라 불렸다. ‘구시골’은 마을이 말의 형국인 마로산의 구시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와룡마을은 송보 아파트와 창덕 아파트 사이에 남아 있는 자연마을이다. 주씨 선산이라고 알려진 솔밭과 대숲을 병풍처럼 두른 남향받이의 아늑한 마을이다.

송보 아파트 뒤에 있는 저수지는 저수지라기보다는 큰 연못 같다. 모기 방제를 위해 미꾸라지를 방류하였으니 미꾸라지 포획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지금은 저수지 앞이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선 도시가 되었지만, 이전에는 이 저수지의 물로 농사를 지어 풍년을 기약했을 것이니, 격세지감이다.

와룡마을 뒤편에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소나무 숲을 들러 보기로 한다. 잘 가꾸어진 커다란 봉분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이 숲은 가까이서 보니 묘지를 위한 숲이다. 창원 황씨 묘역, 신안 주씨 선산이 있는 곳이다. 용이 누울 형국이라 하여 와룡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곳이다.

양향진(57세) 명인은 와룡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버꾸놀이 보존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 양일주(85세) 옹에 이어 광양 버꾸를 보존 계승하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 마로산성

3. 접경지대 광양의 역사, 마로산성

와룡, 관동에서 마로산성을 빼놓을 수 없다. 광양은 4곳에 산성이 있다. 마로산성은 4대 산성중 가장 첫머리에 놓이는 산성이다.

마로산성은 해발 209미터, 나지막한 곳에 있으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동쪽으로 송치재, 남쪽으로 광양만의 바닷길, 서쪽으로는 광양읍이 환하게 펼쳐진다. 성의 둘레는 약 550m, 테뫼식 산성이다. 6세기 무렵 백제의 치소가 있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희양현 시절에도 이 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 초기까지 광양의 중심지였고, 임진왜란 때도 산성 기능을 했다. 역사상 광양 최초의 행정기관인 마로현의 소재지가 이곳이다.

예전에는 광양 지역 학생들의 단골 소풍지였다. 마로 산성 안에는 봉분들이 많았다. 명당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많은 봉분을 정리하고 마로산성은 사적지로 재정비되었다.

마로산성 내부에 5개소의 석축집수정, 1개소의 점토집수정, 그리고 다수의 우물을 마련하였음이 발굴 결과 확인되었다. 만든 지 1,500여 년이 지났지만, 요즘도 집수정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그 높은 곳에 우물과 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었는데, 천오백 년의 세월을 견디도록 축조한 집수정과 우물 덕분이니 옛사람들의 솜씨가 놀랍기만 하다.

산성에서는 ‘馬老官’이라는 명문이 양각된 기와를 포함하여 각종 기와, 토기류, 철기류, 청동기류 등 각종 유물이 출토 확인되었다. 사적 제492호로 문화재 지정 일자는 2007년 12월 31일이다.

▲ 마로산성

4. 광양 박물관을 꿈꾸며

관동 와룡마을 일대는 선사시대와 삼국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물 유적이 많이 발굴된 곳이지만 막상 현장에는 흔한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광양시지」와 이은철 선생의 「광양사로 보는 한국사」 등에 그 내용이 실려 있을 뿐이다.

와룡 고분군이 위치한 곳에서 토기류 등 원삼국시대 유물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은점재는 용강리에서 죽림리의 임기로 가는 고개로 옛날 이 지역에서 은(銀)이 났었다고 전한다. 고갯길에는 지금도 반짝이는 돌들이 간혹 보이곤 한다.

마로산성 서쪽 아래 용강리에는 대규모의 백제 주거지와 고분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이곳에서 다량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 또아리병(環狀甁)과 시루, 심발형(深鉢形)토기가 나왔다. 백제의 최변방 국경지대의 역할을 다 하였던 마로현, 현재 광양에 남아 있는 백제 문화는 모두 이 시기에 꽃핀 것이다.

예로부터 광양에서는 용강리 지역이 주거지역으로는 으뜸이라고 이름이 나 있었다. 포스코 광양제철이 들어섰을 때 사원 주택단지를 이곳에 건설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무산되었다.

지금은 창덕에버빌 1차 총 608세대, 2차 총 1416세대, 용강리 송보 867세대, 용강리 남해오네뜨아파트 800여 세대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광양 나들목에서 차로 2~3분 거리이며, 2번 국도가 인접해 있고 동천 일대의 생태하천 개발로 점차 편리한 주거지로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와룡, 관동마을은 유물 · 유적 등 문화재가 부족한 광양 지역의 보물 창고 같은 지역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출토된 유물들을 한데 모아 작은 박물관이라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사는 지역의 옛 모습을 알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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