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 이야를기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정차순 어머니

그이의 첫 선물
남편이 수줍은 듯 주빗주빗 작은 상자를 건네었다. 선물 상자였다. 나이 60이 다 되어서야 남편에게 받아보는 첫 선물이다.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했지만 그것보다는 지나온 세월이 앞을 가리며 눈물이 맺혔다.

목구멍이 막히며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상자를 열었다.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영롱한 초록의 원석에 다닥다닥 박혀있는 서브다이아. 눈이 부셨다. 커다란 초록의 이파리를 뚫고 솟아오른 수국처럼 목걸이는 영롱하였다. 수국이 한창 핀 들판에 나온 것도 같았다. 손이 떨렸다. 남편이 도와주어서 겨우 목에 걸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오직 목걸이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영국여왕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결혼할 당시 남편은 농사를 지었었다. 광양에 제철소가 생기자 다행히 그곳에 취직이 되었다. 매달 봉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니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여유가 오랜 시간 동안 쌓여 남편의 선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남편은 나의 환갑날에 비싼 18K 금장 시계를 선물해주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감사와 축하의 의미로 값비싼 선물을 해 준 것이다. 시계는 예쁘고 부티나 보였다. 그렇지만 내 가슴 속에는 첫 번째 선물인 목걸이가 더 값진 선물로 기억되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이에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다. 남편의 선물 속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천 번은 더 들어 있는 것이다.

남편의 선물이야기를 들은 한 시인은 어느 날 나에게 이런 시 구절을 읽어주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 라고 말 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 할 수 있는 말일거야”
<황지우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

봉강으로 온지 50여년
부녀회장으로 섬기는 삶

1948년 생으로 올해 74세가 된 나는 20세에 혼인하여 봉강 당저로 오게 되었다. 남편의 나이 26세였다. 시집온 첫해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큰 슬픈 일이 찾아왔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아직 며느리 노릇도 못했는데 돌아가셔서 너무 놀랐고 슬펐다. 몸이 휘청거렸다. 어르신들을 도와 상을 잘 치러내는 것이 그나마 시아버지께 효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했던가? 내게 자상하시며 다정하게 대해주시던 시아버지가 너무 일찍 가셔서 지금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나를 좀 서운하게 할 때면 시아버지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시댁은 고추나 고사리를 재배하는 밭농사를 주로 지었으며 부업으로 가마니를 짰다. 70년대 거의 모든 농가들이 가마니를 짜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모든 농사가 다 어렵지만 밭농사는 뙤약볕에서 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해야 해서 많이 힘들었다. 호미로 김을 매며 풀을 뽑아도 풀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금방 금방 뿌리를 내려 잘도 자랐다. 그 시절에는 너무 일이 많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종일 일만 한 기억밖에 없다. 기쁨이나 슬픈 일을 느낄 틈도 없이 일만 하며 바쁘게 지내온 세월이다.

목걸이를 선물하며 나를 기쁘게 했던 내 남편 주영숙, 그는 지금 80세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착실하게 직장을 다니며 농사를 짓던 그가 20년 전 쯤 뇌출혈로 쓰러진 일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서 남편을 간호하며 그의 재활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풍이라는 것은 완치되기는 힘든 병인 것 같다. 그의 반쪽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지금껏 내 곁을 지켜 준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뿐이다.
봉강 당저에서 이렇듯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다보니 어느새 나는 부녀회장이 되어 마을을 섬기고 있었다.

무표정한 어린 시절
나는 승주 쌍암 출신으로 3녀 1남 중 3째 딸이다. 친정은 벼농사를 지었으며 감나무농장을 했다. 엄마는 부업으로 가발 재료로 쓰기위해 낭자머리를 잘라가고 돈을 주는 ‘달비장사’와 보따리로 이고 다니면서 간단한 물건들을 팔러 다니는 ‘방물장사’를 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장사가 꽤나 수입이 좋았다.

우리 집의 분위기는 다른 가정에 비해 조금 더 엄격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다. 나는 그 설움을 지금까지 가슴 속에 한으로 묻어두고 있다. 아버지가 나를 가르치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 기가 막혀서 지금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유교 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여자들을 많이 가르치면 결혼해서 남편과 시댁에 순종하지 못하고 분란을 일으켜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저 여자들은 제 이름 석자나 쓸 줄 알면 된다는 신조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공부를 가르치면 시집가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마다 친정에 편지를 보내 친정부모를 괴롭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다. 여자는 시집가면 벙어리노릇 3년, 귀머거리노릇 3년, 봉사노릇 3년을 해야 한다고 말하셨다. 무슨 말을 들어도 못 들은 척, ​귀먹은 척하고, 무슨 일을 보아도 못 본 척할 것이며, ​무슨 말이건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을 부덕婦德으로 삼았던 시절이었다. 시집가서 무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다소 어이없는 이유로 학업의 혜택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그저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에 전념해야했다. 그리하여 나의 십대 생활은 고루하고 재미없이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하고 지나가고 말았다.

일만하고 놀 줄도 모르던 청소년 시기의 나에게도 한 번의 일탈의 시간이 찾아왔었다. 친구들을 따라 장날 쌍암장터에 영화를 보러갔던 것이다. 영화라는 게 얼마나 재밌고 신기한 것인지를 들을 때마다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부모님 몰래 영화를 보고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버지의 꾸중과 엄마의 잔소리가 나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보고 온 영화의 아름답고 신기했던 장면들이 눈 속에 떠나기도 전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지만 서럽기도 하고 속상해서 울음이 많이 나왔다. 학교도 보내주지 않은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서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청년 시절은 표정 없는 인형처럼 서럽게 지나가고 말았다.

수국 같은 나의 사랑
당저마을 마을 회관에서 나를 상징하는 꽃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수국을 그렸다. 한 송이의 커다란 꽃 안에 앙증맞은 작은 꽃들이 잔뜩 들어차있는 수국을 볼 때마다 은은한 빛깔과 탐스러운 꽃송이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기곤 하지만 사실 수국의 꽃송이를 볼 때마다 나를 향해 벙긋 웃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아서 더 행복하다.

나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자녀들은 서울과 순천, 보성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둘째 아들과 큰 딸은 멀리 서울에 살고 있고 큰아들과 두 딸은 그래도 여기에서 가까운 순천과 보성에 살고 있어 자주 왕래하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여전히 옛날 사람이지라 큰아들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착실한 성품의 큰 아들은 나를 잘 챙겨준다. 사실 내가 가장 기뻤을 때는 목걸이를 선물 받았을 때 보다 큰 아들이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이다. 남편에게는 비밀이다.
마당에 수국 몇 그루를 심었다. 수국이 환하게 필 때마다 어린아이들이 미소가 활짝 피어나며 그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묘비명을 생각하는 시간
보석 목걸이도 가져보고 금장시계도 차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물건들이 다 부질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가족들이 여전히 내 곁에서 나와 같이 익어가고 늙어가고 있다. 금장시계도 목걸이도 아닌 수국같이 환한 내 가족의 사랑이 나를 활기차게 한다. 그들의 눈빛만으로도 나는 사랑의 말을 들을 수 있다.

- 억울한 시절도 있었고 화려한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 여기 내 영혼은 수국처럼 환하다.
우리 괜찮았지? -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라는 시구처럼
“나 괜찮았지?”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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