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주순남 어머니

나는 가수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좋아 했다. 처음 듣는 노래일지라도 한번만 들으면 이상하리만치 전부 다 외워졌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조용히 혼자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몸과 마음을 키워왔던 것 같다.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될 무렵 나의 노래 실력은 주변뿐 아니라 멀리 다른 마을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나는 ‘노래 잘하는 주순남’ 이나 ‘명가수 주순남’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근 학교의 공식행사 때나 어버이날 같은 큰 행사 때 초정되어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요새 말로 말하면 각종행사를 뛰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디를 가든지 노래와 함께 살아가던 나는 결혼 후에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를 잃어버렸지만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혼자 있을 때에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생의 희로애락을 늘 노래와 같이 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후 당저마을에 친목계가 결성되면서 대절버스로 여행을 가는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게 되었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 불러보는 노래임에도 ‘목소리가 여전히 이쁘다’, ‘음성이 매우 좋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내 노래 실력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아 행복하였다.

나는 주로 나의 젊은 시절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이미자의 노래를 주로 불렀다. ‘섬마을 선생님’이나 ‘섬 처녀’, ‘동백 아가씨’, ‘기러기 아빠’, ‘떠나도 마음만은’ 등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87세인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젊은 가수 주순남’이 되어 앉아 있는 것 같아 행복한 가슴이 되어버린다. 나는 가수였다.

첫 번째 시련

꽃 봉우리처럼 붉고 탱탱한 꿈을 품고 있는 나이 18세, 내가 시집을 온 나이이다. 광양봉강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나보다 7살이나 위인 남편을 따라 순천으로 시집을 갔다.

시댁은 밭과 논 등 땅이 제법 있어서 어려움 없이 먹고 살만하였다. 집안의 막내인 남편은 귀여움을 받고 자란 탓이었는지 씀씀이가 큰 편이었고 나이에 비해 조금 어린 것 같았다. 그래도 다정다감한 성격이어서 나에게 잘 해주고 친절한 말투로 조곤조곤 이야기도 곧잘 해주는 가정적인 남편이었다. 가끔씩 나들이도 같이 다니곤 하였는데,지금 생각해보니 첫아이가 애기였을 때 예쁜 옷을 사 입히고 남편하고 셋이서 나들이 다닐 때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랬던 남편은 내 나이 51세 때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내 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아이도 낳고 순천에서의 결혼생활이 제법 자리를 잡아 갈 무렵이었다. 시숙님이 큰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우리가족이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 단초였던 것이다. 시숙의 사업은 얼마안가 그만 부도가 나버렸다. 시댁의 재산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우리는 거처할 곳을 잃어버렸다. 아이들이 7,8세 되던 무렵이었다.

언제나 반겨주는 고향, 봉강에서

나는 남편과 자식들을 데리고 쫒기든 순천에서 친정이 있는 광양 봉강으로 들어왔다. 그나마 기댈 곳은 친정 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논과 밭을 구해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씀씀이가 컸던 남편은 그 습성을 버리지 못했고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딸 셋에 아들 둘을 낳았는데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학교도 보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빚을 내어야 했다. 빚진 생활의 날들이 늘어나자 버는 족족 빚을 갚아야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위로 딸을 셋을 낳고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못 낳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컸으므로 큰아들을 낳았을 때가 내 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참 영리하고 기특했다. 그랬던 아이들을 가정형편이 어려워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그게 지금까지도 한으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교도 졸업하고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 잡아 살고 있다. 너무 대견하고 고마워서 가끔 눈물이 난다. 특히 막내딸은 광양여고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가까이에서 현재 입시학원을 운영하는데 틈틈이 나를 돌봐주느라 자주 찾아온다.

남편이 먼저 간 후 나는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밭농사만 짓게 되었다. 주로 고사리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어느새 내 허리가 고사리를 닮아 구부러져 있었다. 광양제철이 생긴 후에는 제철에 취업을 해서 비록 허드렛일이었지만 열심히 일했다. 생활비를 벌고 빚을 갚았다. 빚이 많아 힘들었는데 지금은 빚 없이 사니까 너무 행복하다.

“땅속 깊이 뿌리박은 눈물하나 사연하나/ 세상살이 중얼거리는 노랫가락 해그림자/ 내려와 듣고 있는데 어떡하나 어떡하나/ 등 굽은 고구마 황토 묻은 주름살/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우리 어머니/꼬부랑 우리 어머니 꼬부랑 우리 어머니” <김경만 시. 꼬부랑 할머니>

빚을 갚는 일보다 슬펐던 기억도 있다. 어쩌면 내생에 가장 슬펐던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큰아들은 여수공항 직원이었었다. 안정적이고 튼튼한 직장을 영원히 다닐 것 닽??nbsp;아들은 개인 사업을 하고 싶다며 어느 날 갑자기 사표 쓰고 나와 버렸다. 아들은 덤프트럭을 몰고 열심히 사업현장 뛰어다녔는데 그만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하늘이 깜깜해 졌다. 깨어나 치료받는 아들이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다행이 아들은 잘 회복했고 지금은 광양에서 공인중계업을 하고 있다.

나의 묘비명에 대하여

나를 닮은 꽃은 동백꽃이다. 동백나무 옆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함께 그려보았다. 동백꽃은 ‘젊었을 적의 나’를 의미한다. ‘노인이 된 나’가 ‘젊었을 적의 나’를 바라보고 있고 ‘젊었을 적의 나’는 ‘노인이 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서로를 바라보면 둘은 무슨 말을 나누고 있었을까? 젊은 나인 동백꽃은 겨울의 한가운데에서도 꽃을 피워 올리며 잎을 반짝인다.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온 나의 분신 같기도 하다.

- 고사리를 키우며 등은 굽어져갔지만,
가슴은 온통 ‘동백아가씨’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가수다.-

나의 가슴 속에 가수가 되고 싶다는 붉은 꿈을 간직한 채 젊은 시절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시숙의 부도로 시작된 고난도 어느덧 마무리 되었고 이제 나는 내 뜰에서 나의 노래를 부르리라.

“허공에 진눈깨비 치는 날에도/ 동백꽃 붉게 피어 아름답구나/ 눈비 오는 저 하늘에 길이 없어도/ 길을 내어 돌아오는 새들 있으리니/ 살아생전 뜻한 일 못다 이루고/ 그대 앞길 눈보라 가득하여도/ 동백 한 송이는 가슴에 품어 가시라”< 도종환 시, 동백 피는 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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