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陽에 살았던 史람들이 만든 이야기-⑧

고대의 국경은 선이 아닌 점이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 사이의 국경을 오늘날의 남북한을 가르는 휴전선처럼 선의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삼국시대의 국경은 거점성을 중심으로 한 점의 개념이었다.

▲ 마로산성에서 내려다본 광양읍

삼국시대, 성을 중심으로 지방을 통치하다
삼국시대에는 성을 중심으로 지방통치 조직을 정비하였고, 삼국 간의 영토 분쟁 역시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남동부 지역의 백제산성에 관한 조사는 1996년 검단산성 시굴 조사를 필두로 시작되었다.

조사 결과, 6세기 중반 성왕 때 백제는 광양을 비롯한 전남동부 지역에 대한 직접지배를 실현하기 위해 행정적 ․ 군사적 요충지 20여 곳에 산성을 조성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들 산성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군현과 연계하여 방어적인 목적으로 축조되었으며, 섬진강과 남해안의 국경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산성의 축조방법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전남동부 지역의 백제 산성은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계획적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굴조사 때 벼루가 출토되어 행정 관료들이 성내에 상주하였으며, 이들 산성이 단순한 군사시설이 아닌 행정적인 성격도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전남동부 지역의 백제 산성은 축조방법에서 백제 중심지와 비교해 볼 때 조잡하여 급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6세기 중반에 백제가 가야와 신라에 대비하기 위해 변경지역인 섬진강 하구와 남해안 일대에 급하게 축성한 결과로 추정할 수 있다.

▲ 봉암산성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

백제, 마로현에 산성을 쌓다
백제는 마로현(광양)의 세 곳에 산성을 축조하였다. 먼저 마로현의 치소를 방어하기 위해 광양읍 용강리에 마로산성을, 섬진강을 건너오는 적을 막기 위해 진월면 신아리에 봉암산성을, 내륙으로의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진상면 비평리에 불암산성을 쌓았다.

마로산성(209m)에서는 남동쪽으로 송치재, 남쪽으로 광양만, 북서쪽으로 광양읍이 펼쳐진다. 최근의 발굴 결과 전남동부 지역의 백제산성들이 대부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538년 이후에 축조되었으나, 마로산성은 그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마로산성은 백제가 섬진강 서안의 전남동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거점성으로 가장 먼저 축조한 성이었다. 성의 둘레는 약 550m이다.

▲ 마로산성 출토 백제 수막새
불암산성(231m)에서는 남쪽으로 진상면 소재지와 평야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백제가 이곳에 산성을 쌓은 이유는 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켜 백제 내륙으로 침입하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었겠지만, 불암산성을 오르는 이 시대 우리의 시선을 유혹하는 쪽은 남쪽이 아닌 북서쪽이다.

불암산성의 성벽에 걸터앉아 수어 저수지 너머 백운산의 억불봉을 바라보는 눈 맛은 자못 통쾌하기까지 하다. 성의 둘레는 약 500m이다.

봉암산성(170m)은 남동쪽으로 섬진강이 연하고 있어 강 건너 하동 쪽의 금성면 일대가 보이며, 남쪽으로 망덕포구와 태인도, 서쪽으로는 진월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 건너 하동의 산성과 더불어 섬진강 하구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이 봉암산성은 전체 둘레가 약 100m밖에 안 되는 소규모여서 산성이라기보다는 섬진강을 따라 이동하는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보루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래서 공식 명칭은 ‘광양 진월 신아리 보루’이다.
▲ 마로산성 석축 집수정

마로현 백제산성의 특징
마로현의 백제산성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 산성은 모두 해발 200m 내외의 야트막한 야산 정상에 쌓은 작은 석성에 지나지 않지만, 산성 성벽에 올라서면 사방이 확 트인 전망을 확보한 전략적 요새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산성은 축조하는 방식에 따라 테뫼식, 포곡식, 복합식으로 구분한다. 테뫼식 산성은 산 정상부를 둘러싼 것이고, 포곡식 산성은 산의 계곡을 자연능선에 따라 둘러싼 것이다. 그리고 복합식 산성은 테뫼식과 포곡식을 혼합한 것이다. 마로현의 백제산성은 모두 테뫼식 산성이다.

셋째, 산성은 축조하는 재료에 따라 석성, 토성, 토석혼축성으로 나눈다. 이 중 석성은 성벽의 축성 방법에 따라 협축식, 내탁식, 편축식으로 나뉜다. 협축식은 성벽의 안팎을 모두 돌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고, 내탁식은 외벽만을 성돌로 쌓고 안쪽은 흙이나 잡석 같은 것으로 뒤채움하는 방식으로 성 안쪽에 자연스럽게 도랑이 만들어진다.

편축식은 외벽만을 쌓아 올린다는 점에서는 내탁식과 같지만, 안쪽은 성내의 높은 지형을 깎아서 뒤채움하는 방식으로 도랑이 아닌 회랑이 생기게 된다. 광양의 백제산성들은 모두 협축식 석성이다. 이것은 마로현이 당시의 국경지대로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

넷째, 산성 내부에서 다른 유적에서는 보기 어려운 승문(繩文, 새끼문양) 기와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지역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마로산성의 발굴 시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각종 기와였다. 수십 동의 각 건물지에서 다양한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어 모든 건물이 기와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31종에 이르는 총 247점의 수막새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그 문양이 특이하여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광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마로관(馬老官)’이라는 명문이 양각된 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시대 6세기부터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까지 이 지역에 마로현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일치함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마로현의 백제산성에 올라보자
산성은 전시에 장기 농성하는 장소로 이용하는 군사시설이므로 반드시 산성 내부에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 특히 계곡을 끼고 있지 않은 테뫼식의 경우 물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 마로산성 내부 전경
마로산성의 경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성 내부에 5개소의 석축집수정, 1개소의 점토집수정, 그리고 다수의 우물을 마련하였음이 최근의 마로산성 발굴 결과 확인되었다. 이 중 석축집수정은 한번 들어온 물은 절대 밖으로 빠지지 않도록 토광과 석축 사이에 점질이 아주 강한 점토를 1m 이상 채워 완벽한 방수가 되게 치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만든 지 1,500년이 지났지만, 요즘도 답사를 가면 언제나 집수정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로현의 백제산성에 꼭 한 번 오르기를 권한다. 단, 산성 답사는 겨울에 할 일이다.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에 산성을 오르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올라서도 전망이 확보되지 않는다. 산성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에 올라 매서운 칼바람 속에 그 아래를 내려다볼 때, 비로소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개념 쏙쏙>

성의 종류

성은 위치 ․ 기능 ․ 지형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도성 : 왕궁이나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성
읍성 : 지방의 행정, 경제, 군사의 중심지에 쌓은 성
산성 : 유사시에 대비하여 방어용 또는 도피용으로 산에 쌓은 성
창성 : 창고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
진보 : 군사적 요충지에 쌓아 군인들이 주둔하는 성
행재성 : 왕이 행차할 때 일시 머물기 위한 성
행성 : 국경과 요새지에 쌓은 성

검단산성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의 피봉산(138.4m)에 있는 백제 석성이다. 여수반도와 순천 ․ 광양 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는 광양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새지이다.

그동안 정유재란 때 조 ․ 명 연합군이 순천 왜성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하면서 쌓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순천대 박물관의 1996년 시굴 조사와 1998~99년 2차례 발굴 조사 결과 6세기 후반에 조성된 백제의 테뫼식 석성으로 밝혀졌다. 이후 전남동부 지역에서 20여 곳의 백제 산성이 조사되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