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김외남 어머니

엄마처럼 누이처럼

나는 순천 서면 지번마을에서 4남 4녀 중 큰딸로 태어났다. 당시 시골마을은 거의 친척들이 한 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는 집성촌이 많은 시절이었다. 우리 마을도 마찬가지여서 주위의 이웃들이 거의 다 친척들이었다.

주변에 친척이 많이 산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었지만 때론 복잡하고 할 일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맏딸로 태어난 나는 엄마를 도와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친척들의 빈번한 오고감이 때론 힘들 때도 있었다.

우리 집은 삼베농사를 많이 지었다. 모시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크게 되면 수확을 해야 하는데, 삼베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특히 5월부터 10월까지는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바쁜 생활을 해야 한다. 모시를 수확해서 실을 짓고 천을 만들기까지는 무수한 손을 거치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힘든 작업이다. 엄마는 수확에서부터 길쌈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의 일을 감당해야 했다.

바쁘고 고단한 엄마는 어린동생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엄마대신 나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아기인 동생들을 업어 키우며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해야 했다. 8남매인 우리 집에서 나의 등을 거쳐 가지 않은 동생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내 키가 작은 이유도 많은 동생들을 업어 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녀시절을 이렇게 고단하게 보낸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다. 그렇게 지내다가 20세에 중매로 봉강 당저라는 곳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남편은 큰아들이며 나와는 한 살 차이이다.

봉강에서의 엄마노릇

시댁의 풍경도 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댁도 모시농사를 지었고 길쌈을 했고 가마니를 짰으며 벼, 매실, 고구마, 콩, 밀 등 종류별로 논밭농사를 많이 지었다. 당연히 시어머니는 많은 일은 감당해야했고 집안일이나 시동생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바쁜 생활 속에 시어머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 엄한 편이셨다. 나는 시어머니가 무척 어려워서 더욱 완벽하게 집안일은 하려고 노력했다.

생의 반 이상을 엄마노릇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었을까? 시집을 오니 막내 시동생이 1살이었다. 시동생을 키우는 일이 내 몫이 되었다. 큰 며느리인 나는 시동생과 시누이들을 업어서 키우며 엄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지금 나의 허리는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굽었지만 나는 지난날의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막내 시동생은 업어 키우며 돌본 나의 공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친엄마처럼 대해준다.

시어머니는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너희 아기는 막내 시동생 7살 먹은 후에 낳았으면 좋겠다”고 예언처럼 말하곤 하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일부러 낳지 않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아기가 생기지 않아 매우 불안하였다. 맏며느리로서 대를 잇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속에서 나는 시어머니의 바람대로 결혼 후 7년 만에 임신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나는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시동생과 시누이들을 보살펴야했다.

“꽃은 피었다/ 말없이 지는데/ 솔바람은 불었다가/ 간간이 끊어지는데//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겨드랑이에 누워/ 푸른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 <정채봉의 시, 엄마>

나도 울 엄마 팔베개를 베고 누워 엄마 품에 안겨보았으면 좋겠다.

맨드라미 같은 나의 가족

나를 생각하며 그린 꽃은 맨드라미이다. 닭의 벼슬을 닮은 맨드라미는 우아한 주단 같은 꽃이다. 부들부들하며 매끄럽고 따스하며 기품이 있는 붉은 색을 가지고 있다. 머리위에 쓰는 왕관을 닮기도 했고 고관대작의 예복을 닮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나보다 1살 위인 남편은 86세인데 여전히 나를 위해주며 잘 대해준다. 워낙 다정다감하고 인자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와는 결혼생활동안 서로 다투어 본 기억이 없었다. 남편은 맨드라미처럼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장날만 되면 나를 데리고 장에 가서 물건도 사고 이것저것 구경도 하다가 국밥집에 가서 외식도 시켜주며 장터 데이트를 즐겼다. 지금은 내가 무릎과 다리가 아파 돌아다니는 게 힘들어 같이 장에 가지 못하지만 남편이 시장을 봐다주곤 한다.

나는 2남 1녀를 출산하였다. 아들 둘은 광야에 살고 있고 딸은 순천에 살고 있다. 큰아들은 광양의 농협 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자녀를 키우면서 최고로 잘한 일은 딸을 대학에 보낸 일이다. 당시의 농촌에서는 딸들은 대학을 보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힘껏 뒷바라지 해주지도 못했는데 딸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중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사위는 교감선생님이 되었다. 전문직을 갖고 열심히 생활하는 것도 고마운데 매달 정기적으로 용돈을 보내주어서 딸에게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하다.

자랑하고 싶은 일은 큰 손주가 광양제철 취직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증손자가 대학원까지 다니는 집은 아마 우리 집 하나일 것 이다.

묘비명에 대한 생각

나의 삶에서는 크게 기뻤거나 슬펐던 일들이 없었던 것 같다. 자녀들도 다 잘 자라주어 제자리에서 잘 살고 있고 남편도 아직까지는 건강하게 살고 있다. 내 인생은 대체로 평탄하게 지나온 것 같다.

- 동생도 시동생도 자녀들도 내 등에서 키웠다. 엄마노릇 원 없이 했다. 나도 이제 울 엄마 품에 안기러 간다. 엄마...!

맨드라미의 꽃말처럼 내 가족은 나를 방패처럼 지켜준다. 요즘의 평안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나이드니 나이든 대로 행복하다. 다만 80이 넘어가니 몸이 조금씩 아플 뿐 마음은 여여如如할 뿐이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렇게 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눈이 보인다/ 귀가 들린다/ 몸이 움직인다/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고맙다! / 인생은 아름다워” <쥘 르나르 시, 인생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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