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번창하는 신성마을

신성마을은 유당공원과 5일 시장으로 인해 새롭게 번창한 마을이기도 하다. 원래는 성밖 변두리 마을로 불리는 개성마을에 속해 오다가 1980년 개성마을에서 분리되었고 성밖 변두리에서 새로 번창하는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양읍 5일 시장, 시외버스정류장, 유당공원, 광양경찰서 등 굵직굵직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어 광양을 들고 나는 사람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5일 시장과 유당공원은 광양읍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역동적인 곳이며 지금도 외지에서 광양을 찾는 사람들이 한 번씩 둘러보는 코스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들 장소를 살펴보는 것은 신성마을의 과거를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정원 같은 유당공원

▲ 유당공원

광양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유당공원은 매우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였다. 각급 학교에서 이용하는 소풍 장소이자 자연학습장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공원 곳곳에 많은 고목들이 우거지고 평탄한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모임이나 선거와 같은 집회가 열려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았다. 또한 매년 지역의 큰 행사이기도 했던 씨름대회가 열려 시끌벅적했던 곳이었다.

지금도 버드나무와 고목들이 연못이 만나 호젓한 공원을 이루고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나무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천연기념물 235로 지정된 이팝나무인데 수령이 440년쯤 됐으며 할아버지나무라고 불리어지기도 한다. 매년 입하(立夏) 무렵이면 하얀 꽃들이 나무를 뒤덮곤 해서 입하목이라 부르기도 했고 꽃 모양이 흰 쌀밥을 닮아 이밥(쌀밥)나무로 불리어졌다.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시절 지역 사람들은 그 꽃을 바라보며 허기를 달래곤 했다. 또한 이팝나무꽃이 피는 모습을 보아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도 했는데 때때로 나무 아래에서 치성을 드리며 풍년을 빌기도 했다. 공원 안에는 이팝나무를 비롯해 느티나무와 푸조나무, 팽나무들이 연못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유당공원은 광양의 박세후 현감이 1528년에 조성했는데 당시에는 일본 해적들이 해안가를 자주 출몰해 관아에 보관된 곡물창고를 털어가곤 했다. 이를 막아보기 위해 1547년을 전후해서 광양읍성을 쌓고 멀리 바다에서 왜구로부터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팽나무와 이팝나무, 푸조나무, 연못 주변으로는 버드나무를 심었고 버들 유, 못 당의 이름 글자를 따서 유당공원이 되었다. 지금은 이팝나무를 비롯해 푸조나무, 팽나무 등 23그루가 남아있다. 과거에는 백운저수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도심을 통과해서 그 물이 유당공원으로 유입되며 자연수로 흘렀지만, 지금은 수로가 막혀있어 지하수에 의존하고 있다. 연못은 여러 차례 담을 쌓고 허물기를 되풀이하다가 지금은 원형으로 남아있다. 1960년 초반 공원 옆에는 광주보병학교 유격대인 ‘나를 따르라’ 부대가 주둔하면서 연병장을 만들고 막사를 만드느라 공원의 많은 나무들이 베어졌고 지금과 같은 작은 규모의 공원으로 남게 되었다 한다.

삶의 희비극이 교차하던 곳

▲ 유당공원 내 비석군들

공원 내에는 궁도장인 유림정이 있었는데 원래 궁술을 연마하기 위해 건립됐으나 여러 차례 장소를 옮겨가면서 지역 유지들이 활을 쏘며 즐기는 놀이장이거나 연회장으로 바뀌었다. 활쏘기 시합이 있을 때면 종종 기생을 불러 연회가 벌어지곤 했다. 또 화살을 수거하거나 깃발을 흔드는 일은 가난한 아이들의 몫이었다. 아이들에겐 수고한 대가로 사탕이 주어지곤 했다. 가난한 시대이었음에도 부와 권세를 누렸던 사람들과 호구지책을 이어가기 위해 그들을 시중들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의 불공평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공원에는 혹독하고 쓰라린 삶의 역사가 숨어있다.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원군에 몰리며 마지막까지 격렬하게 싸웠던 광양 읍내는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고, 결국 광양 순천지역의 동학군을 지휘했던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와 수접주 유하덕 이하 200 여명이 유당공원에서 효수되거나 총살되는 대학살의 현장이기도 했다.

공원 한 모서리에는 오랜 비바람에 마모되어 두꺼운 이끼를 뒤집어 쓴 비석군들이 사열하듯 서 있다. 광양 지역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이 이곳으로 이전되었고 광양현감과 전라관찰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 12기, 광양 지역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비 2기와 정려비 2기 등 총 16기가 있다. 이름자 끝에는 애민비 선정비 공적비라고 적혀있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내용의 비문은 실제와는 다른 경우가 보이곤 한다. 또 나라와 백성에 등을 돌린 채 앞장 서서 국권을 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친일파, 조예석, 이근호 등의 비석도 있다.

최근 시에서 친일파 비석 앞에 단죄문을 새겨 과거 그들의 죄과를 응징하고 있다. 이 밖에도 공원 안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혼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을 비롯 전쟁에 참가했던 외국인 참전유공자 기념비가 있다.

노거수들의 보금자리에 대한 제언

유당공원은 광양이 지나온 역사와 시대별 다양한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관된 곳이다.

그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인은 다름 아닌 살아있는 노거수들이다. 공원은 그들로 인해 한층 품격이 높은 듯하지만,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소음과 무분별한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 공원을 보호 할 수 있는 돌담이나 흙담을 쌓아 쾌적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살려가는 일이 시급하다고 본다. 또 공원이라 하기엔 그 면적이 너무 좁은데 주변 공간에 더 많은 나무를 심어 숲이 우거진 산책길을 만들 필요가 있다. 공원 배후에 튼튼한 나무들이 문명의 바람막이처럼 둘러선다면 노거수들이 활기를 띨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변화를 꿈꾸는 5일장

▲ 광양 5일장

광양읍 5일장은 원래 현재 매일 시장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되었고 1964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됐다. 한때는 철도역이 있던 구 광양역 앞에서부터 현재 위치까지 길게 시장이 서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 광양장은 전남과 경남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전남 경남 일대의 많은 보부상과 장돌뱅이들이 진을 치고 다닌 큰 시장이었다. 또 인근에 산과 바다가 있어 풍부하고 싱싱한 농수산물이 유입돼 인근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곤 했다.

흰색의 지붕과 현대식 시설로 단장되고 시장 내 먹자골목이 생겨나면서 먹거리도 한몫하고 있다. 김제원(54) 상인회장은 “전국 1500여개의 전통시장 가운데 해마다 30~40개의 시장이 없어진다. 5일 시장도 먹거리 중심으로 변화가 필요하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상품을 파는 노점을 많이 입점시키고 청년들이 가세하면 한층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청년의 역할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5일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기능은 물론 서로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소통과 친화의 공간으로 사랑받아왔고 지역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요즘은 현대화된 대형마트나 거대 택배 판매 시스템의 출현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들의 도전에 살아남기 위해 앞으로 5일 시장만의 고유한 색깔을 키워가면서 새롭게 변모해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 이 글은 2020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사업비를 지원받은 연구보고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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