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리 성황·개성 마을의 한옥과 골목길

‘남도 예쁜 정원’ 우수상, 도심의 쉼터

‘도심의 쉼터’라는 간판을 단 이 집은 「제1회 남도 예쁜 정원 콘테스트」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주인인 이용재 씨는 광양읍은 보석 같은 고장이라고 말문을 연다. 백운산이 뒤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고, 백운산에서 발원한 두 갈래 물길이 읍을 감싸 안고 흘러가는데 한쪽이 열려 바다와 연결되는 형세가 범상치 않아 보인단다.

이용재 씨는 마삭줄로 이 ‘보석 같은 읍’을 아름답게 가꾸면 좋겠다고 한다. 「도심의 쉼터」 담 위에도 마삭줄을 얹었는데, 손질을 잘해놓아 여간 멋스러운 게 아니다.

▲ 도심의 쉼터 정원

2002년 광양에 정착하고자 마당과 우물이 마음에 들어서 이 집을 샀는데, 김종호 전 장관의 생가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우물이 아주 깊고 안쪽으로 쌓은 돌이 지금도 이 하나 빠지지 않고 견고하다. 대지 210여 평, 군데군데 흙을 돋워 화단을 만들고 샛길을 만들었다. 연못을 들이고 텃밭을 가꾸니 그야말로 없는 게 없이 넘치는 정원이 꾸며졌다.

이 씨는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정성이 들어간 정원을 가꾸며 살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복원이 잘 된 한옥 한 채

성황리 길가에 예쁜 돌확과 맷돌을 이어서 만든 수각이 눈에 띄었다. 푸른 이끼가 풍성하게 덮인 것이 운치가 있다. 김종호 전 장관의 외갓집이었다고 한다.

현재 대한노인요양원을 운영하는 천강란 씨는 2012년에 이 집을 구입하고 집을 복원, 수리하였다. 쓸데없이 덧대어 놓은 것을 다 걷어내니 대들보, 서까래, 보, 주춧돌이 드러나는데 비로소 아름다운 한옥이 보이더라고 하였다. 니스 칠을 해놓았던 것을 벗기니 말간 송진이 흘러내렸다. 서재로 쓰고 있는 곳의 천정은 나무의 곡선을 그대로 살린 웅장한 대들보가 멋스럽다. 서까래도 일품인데 하나같이 나무를 그대로 다듬어서 모양이며 굵기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풍긴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이 읍에 있다니, 생각지도 않게 보물을 만난 것 같다.

▲ 대들보와 서까래

천강란씨는 이 집이 부부만의 공간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전통가옥의 멋스러움을 알리고, 특히 아픈 사람들이 위안을 받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광양 읍내 한옥은 한반도 남부지방 가옥의 일반적 형태인 ‘一’자형 건물들이다. 창호와 마루가 발달 되어 있으며, 한때 넓었을 안마당은 농경사회의 필수적인 작업 공간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거의 화단 등으로 바뀌어 남아 있지 않다. 대청마루도 흔적은 있으나 지금은 모두 방으로 개조되어 있다.

광양의 오래된 가옥을 찾아다니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제법 잘 지어진 옛집 가운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한옥의 역사가 담겨 있는 가옥들을 가꾸고 지켜나가는 일은 주거 문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개성과 성황의 골목길

‘목성리’ 하면 골목길을 먼저 떠올린다. 개성과 성황마을의 골목길은 미로와 같았던 옛 골목이 가로, 세로로 지나는 소방도로에 뚫려 미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더구나 집집이 이어졌던 돌담은 몇몇 가옥의 담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예전에는 마을 인근 개울에 굴러다니던 돌이나, 논이나 밭에서 나온 돌들을 찰흙 반죽과 함께 듬성듬성 쌓아 올려 내구성이 떨어지는 흙 돌담을 집마다 둘렀다. 1970년대 중반 무렵만 해도 이 버글버글한 돌담 때문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화가 많았다. 무화과 서리를 나선 남학생들이 담을 밟고 올라서 무화과에 손을 뻗치는 순간 그만 흙담이 무너져 담 안쪽으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마침 우물가에서 씻고 있던 처녀와 마주쳐 물벼락을 맞았다는 일화도 있고, 귀한 단감을 따려다 담이 내려앉는 바람에 오줌을 모아두는 통으로 빠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수각

하물며 경찰도 범인을 쫓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곳이라니 이만하면 광양의 명소가 될 법하지 않았을까?. 한참 혈기 왕성한 젊은 친구들은 싸우다가 목성리 골목까지만 잘 도망가면 안전지대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아다녔다니 말 다 했다.

게다가 좁은 골목길이 반듯하지도 않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데다, 예전에는 골목길에 ‘해치(수채의 방언) 고랑’이 같이 흘렀다. 하수구 기능을 하는 고랑이었는데, 이 ‘해치 고랑’에 실지렁이들이 살아 남실거렸다. 친구들하고 술래잡기하며 전속력으로 뛰어다니다 보면 구불구불한 골목의 커브에 중심을 잃고 해치 고랑에 발이 빠지는 일도 허다했다.

아직 한편에 돌담을 간직하고 있는 집 가운데 허 교장 댁이 있다. 도시 내 한 블록을 차지할 만큼 대지가 넓은 집이다. 개성과 성황에 남아 있는 돌담은 현재 도심의 쉼터 인근, 허 교장 댁 인근의 몇 군데뿐이다.

반가운 것은 지금도 골목길에 들어서면 성인 두, 세 사람이 걸으면 꽉 차버리는 좁은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영달이 골목 등 몇 군데가 그렇다. 삐뚤빼뚤 이어지는 길이 끝도 없을 것 같은 착시를 느끼게도 하는 것이 이곳이 바로 ‘옛 목성리 골목길’임을 상기시켜준다.

현재 개성 마을과 성황마을 옆 동뜰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장단점이 있겠으나 고층 아파트 건설로 인해 귀한 것을 잃게 되었으니, 마로산성에 해 뜨는 것이나 백운산의 아름다운 능선과 봉우리를 마을에서 볼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개성 마을에는 천주교 광양성당과 목성우체국, 광양로컬푸드마켓이 있다. 목성아파트는 성황리에 있으며, 총 13동 520세대로 1986년 4월에 입주한 광양에서는 첫 아파트 건물이다.

별다른 변화 없이 정체된 듯 보여도 마을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골목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 가고 싶어질 것이다.

정은주 광양문화연구회 회원
(※ 이 글은 2020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사업비를 지원받은 연구보고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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