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곽옥례 어머니

영사기 곁의 소녀

우리 집은 광양 봉강면 저곡이다. 나는 1946년 5남 2녀 중 둘째이자 맏딸로 태어났다. 주로 벼농사를 많이 짓는 우리 집는 농촌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늘 일 손이 부족했다. 동생들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다른 동생의 손을 잡고 밭일을 하고 있는 엄마를 보러 가기도 하고 뒷동산에 올라 해질녘 붉고 환한 노을에 가슴을 적시어 보기도 했다.

그랬다. 영화를 보는 일이 그러했다. 영사기가 돌아가고 주변이 어두워지고 화면에 빛이 들어오는 일은 하늘의 한 켠에 찬란한 노을이 가득 쏟아지는 일과도 같았다. 어스름 곁에 내려앉는 영화라는 노을, 그 빛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와 내 마음의 하늘에 별처럼 박혔다. 때로는 폭죽이 터지는 것도 같았다. 얼굴에 환하고 노란 빛의 꽃이 개화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인자하시고 다정한 분이셨다. 우리들을 대할 때는 언제나 조용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얌전하신 성격이셨으며 우리들에게 애정이 듬뿍 주시는 분이였다.

그런 부모님은 영화를 보러가고 싶다는 나의 요청을 잘 들어주셨다. 맏딸인 나의 수고를 보상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덕에 나는 자주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며 그 푸른빛이 도는 스크린에 매료 되어가기 시작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며느리 설움’, ‘장화홍련전’, ‘춘향전’ 등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영화이다.

그러나 취미생활과 같던 영화관 가는 일은 결혼과 동시에 심장이 정지된 것처럼 멈추어버렸다. 내 마음속에서 쏟아지던 별들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새로운 터전, 모신다는 일의 엄중함

나는 22세 되던 해에 중매로 봉강 당저마을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남편은 맏아들이며 당시 26세였다. 지금은 79세의 할아버지가 된 남편은 비교적 건강한 편다. 시댁식구들 중 몇몇은 천성적으로 무뚝뚝한 것 같은데 남편도 그 중의 한명으로 다정다감하지 못한 성격이다. 나는 서운할 때가 많았다.

남편 덕에 친정에서도 맏이였던 나는 시집와서도 맏이 되었다. 시집 왔을 당시 막내시동생이 5살이었다. 나는 6남 2녀의 맏며느리로 5명의 시동생 중 3명을 자식처럼 키웠다. 시댁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했다. 맏며느리인 나는 농사일에 집안일에 시동생 거두는 일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고 고단한 날들을 보냈다.

친정에서는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구김 없이 살았는데 시집을 오니 너무 다른 분위기여서 적응하는데 조금 애로가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시어머니가 어려워서 맘이 편하지 못했고 늘 불안했다. 시어머니는 천성적으로 무뚝뚝한데다가 완고하시고 엄한 분이셨는데 나의 내성적 성격이 시어머니를 필요이상으로 무서운 분이라고 느끼게 했던 것 같다.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나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고 말 수도 부쩍 줄어들게 되었다.

내 나이는 75세이다. 나는 최근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나도 노인이라 누군가의 수발을 받아야 할 나이가 되었지만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일이다. 시어머니는 현재 95세인데 여태껏 집에서 모시다가 더 이상 집에서 모실 여건이 되지 않아 마음이 아프지만 4달 전에 요양원으로 모셨다. 나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요즘도 어머님을 뵈러 하루가 멀다하게 요양원을 다녀오곤 한다. 아직 나의 며느리로서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쉽지는 않다.

나의 곁, 나의 가족

나는 2남 1녀를 출산했다. 아이들은 모두 광양에 살고 있다. 가까운 곁에 자녀들이 살고 있고 남편도 곁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도 같다. 아이들은 바쁜 와중에도 자주 들리고 이것저것 해다 주고 우리부부를 잘 보살핀다.

광양에 제철공장이 생기자 많은 광양 사람들이 그곳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다.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남편도 제철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우리는 정기적인 급여를 받는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내가 50세 되던 생일날이었다. 전혀 기대하지도 못했는데 그렇게도 무뚝뚝한 남편이 내게 목걸이를 선물한 것이다. 마치 꿈 속에서 와 같은 일이었다. 자녀들도 주변 사람들도 다들 놀라워하며 부러워했다. 작은 목걸이 하나가 그간 남편에 대한 나의 서운함을 스르르 녹여 버리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나의 목에 걸려 남편과 나 사이에 틈이 생길 때마다 메꾸어 주며 반짝이던 그 목걸이를 나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영원히 걸고 있다.

생각해보니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장이서는 날에는 나와 함께 장에 가서 이것저것 살뜰하게 장도보고 국밥집에 가서 밥도 사먹고 하는 소소한 장터 테이트를 하곤 했다. 마을에 친목계가 생긴 후에는 설악산이나 제주도 등지에 부부동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나였지만 결혼하기 전에는 친구들 틈에 끼여 영화관을 갔었고 복숭아밭이나 수박밭에 가서 과일도 먹고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고 하였는데 결혼 후에는 그런 모든 것과 단절된 시간 속에서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장터는 나의 특별한 나들이터이며 쉼터였다.

묘비명에 대한 단상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나를 닮은 꽃을 떠 올릴 때마다 나의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환한 얼굴의 빛나는 해바라기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해바라기는 스크린의 빛 속에 빠져 들어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소녀적 얼굴인 것 같다.

- 내 가슴속에는 유년의 해바라기 씨앗이 심어져 있었다.
고단한 삶이었으나 가끔은 영사기 앞 해바라기로 피어올랐다. -

내가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 환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 지금도 남아있는해바라기씨앗에 싹이 터 올라 내 얼굴로 황금 빛 추억을 듬뿍 길어 올리고 환한 꽃이 되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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