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따뜻한 불빛아래 정다운 밤

▲ 김복례 어머니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을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김용택 시, ‘그 여자네 집’ 중>

따뜻한 불빛의 문틈으로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하얀 모시와 광목에 한 땀 한 땀 붉은색 꽃을 얹고 초록색 잎사귀를 놓는 여자아이들의 앳된 손, 밤마다 옹기종기 둘러앉아 수를 놓고 있는 우리 집의 밤풍경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딸이 있는 집에서는 딸들이 자신의 혼수준비를 직접 했었다. 본인의 혼수 준비라고 해봐야 수예품 정도였는데 상보나 옷 가리게, 횟대포, 방석, 베갯잇 같은 것이었다.

유독 여자형제가 많았던 우리는 혼수준비를 미리미리 해 놓아야 했기에 밤이면 등잔불 아래에 모여 엄마가 가르쳐 주는 대로 수를 놓았다. 처음에는 수가 얌전하게 놓아지지 않고 삐뚤삐뚤 들쑥날쑥 하게 놓아졌다. 하지만 점점 실력이 늘어나자 내가 놓고 싶은 풍경이나 사물을 그려서 자유로이 놓을 정도가 되었고 동생들을 가르치며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20살이 되던 해 나는 손수 수놓은 것들을 들고 광양의 봉강으로 시집을 갔다. 혼수 보따리를 챙겨주면서 엄마는 그것들을 깨끗이 빨고 다리고 차곡차곡 개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시집가서는 친정 생각하지 말고 그 집 귀신이 되어야한다. 무탈하게 잘 살거라”고 말한 엄마의 음성이 결혼생활 내내 귓전에 맴돌았다. 상보나 옷 가리게를 볼 때 마다 나는 친정식구들과 함께 있던 따뜻한 풍경들을 생각하며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대가족 안에서 듬뿍 받은 사랑

나는 방앗간 집 딸이었다. 시골에서 방앗간을 하면 제법 잘 사는 축에 속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며 9남매가 있는 대가족이었다. 집에는 일을 거드는 일군들도 몇 있었다. 그 덕에 나는 다른 집 또래 아이들보다 집안일을 많이 거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 우리 9남매는 넓은 집 마당에서 거의 매일 놀이를 하며 지냈다.

숨바꼭질. 비석치기. 줄넘기, 그네타기 등의 놀이를 주로 했는데 놀다가 지치고 배가 고파지면 옥수수나 고구마 등 간식을 먹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숨바꼭질을 할 때면 장독대 뒤에 숨거나 헛간이나 대문 뒤, 마루 밑에 숨기도 하였는데 마루 밑은 술래에게 가장 잘 들키는 곳이었다. 대문 뒤에 숨으면 신발이 다 보여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린 동생들은 잘 찾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하루 종일 뛰어 놀다보면 마당의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고 금 새 땅거미가 내려앉곤 했다.

놀이에는 평등했던 우리 집이었지만 배움에 있어서는 평등하지 못했다. 배움의 해택은 내 아래로 셋이나 있었던 아들들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동생들의 학비에 보탬이 되도록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거들며 지냈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배움의 길을 가지 못한 것에 속을 끓이기도 했다. 그러지만 화목하고 밝은 가족 안에서 행복한 소녀시절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내 삶은 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그 따뜻하고도 슬픈 이름

나는 1942년 보성에서 3남 6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20살이 되던 해에 중매로 21살의 신랑과 결혼해 광양으로 시집을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남편은 특별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늘 자상하게 대해주는 사람이다.

그는 현재 81세로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자상한 성격이라고 해도 남편은 소소하게 뭔가를 챙겨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받아본 선물이라곤 내 환갑 때 받은 장미꽃다발이 전부였다. 내게 꽃다발이 전해지는 그 순간의 행복이란 것은 붉은 장미 보다 더 붉게 달아올라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아찔함이었다. 너무 자주 선물을 받아왔다면 나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시댁은 벼농사를 주로 지었지만 과일 등 다른 농작물도 재배하였다. 친정에 비해 경제적으로 조금 부족했지만 남편과 함께 열심히 일해서 크게 부족함 없이 먹고 살만했다. 15년 전부터는 감나무, 매실나무, 다래 등을 대량으로 심어서 출하며 더욱 풍성한 농촌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나는 농사일 뿐 아니라 꿀을 가공하는 가까운 공장에 다니며 일을 했다. 남편은 10년간 동네 이장 일을 보며 마을을 위해 일했고 농기계를 잘 다룰 수 있어 주변의 농장 등에 가서 일을 해주고는 했다. 아이들이 한창 자라날 때 남편과 나는 우리의 일손을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가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큰아들은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기도 했지만 가장 큰 슬픔도 주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마음 씀씀이도 깊고 열심히 공부도 하며 부모생각을 많이 한 아이였다. 시골에서 자라고 공부했으나 공부를 잘해서 광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아들이 장학금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던 아들이 5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후 큰 아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내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지금 나는 딸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딸이 봉강에서 다래농사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막내아들과 같이 동업하여 다래농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런 연유로 나는 외 손주들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그 아이들이 우리 집 마당에서 시끌벅적 노는 것을 보면 내 유년의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의 묘비명에 대하여

집 마당에는 해바라기 몇 그루 심어져있다.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나는 친정에서 재미있게 지낸 던 어린 시절의 형제자매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자식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수놓은 옷 가리개에도 노오란 해바라기가 몇 그루 피어있었다.

- 내 삶의 보자기를 펼치자 한 땀 한 땀 수놓아진 해바라기가 금빛 웃음을 머금고 있다. 웃자, 인생이 별거인가! -

나는 어쩌면 해바라기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자식들만 보면 지금도 해바라기처럼 밝게 웃게 되는 ‘자식바라기’이기 때문이다. 중년의 나이에 남편과 같이 갔었던 제주도에도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있었다. 나의 가족은 내 삶에서 온통 황금빛 광채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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