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2 - 이성부

아침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짐승도 예술도
아직은 만나지 않은 아침이여 전라도여
그대 심장의 더운 불, 손에 든 도끼의 고요
하늘 보면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꿈속에서만 몇 번이고 시작하던
내 어린 날, 죽고 또 태어남이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아니어라.

사랑이어라.
광주 가까운 데서는
푸른 삽으로 저녁 안개와 그림자를 퍼내고
시간마저 무더기로 퍼내 버리면
거기 남는 끓는 피, 한 줌의 가난

아아 사생아여 아침이여
창검이 보이지 않는 날은
도무지 나는 마음이 안 놓인다.
드러누운 산하(山河)에는
마음이 안 놓인다.

시인 이성부

  1. 년 광주 출생
  1.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우리들의 양식> 외 다수

  1. 년 한국문학작가상 외 다수
  2. 년 사망

194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해 시인 김현승의 가르침을 받은 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꽤나 빠르게 문단 속에 진입한 셈인데 이미 고교 시절 전국적인 문예공모를 통해 이름을 알렸던 그였음을 생각한다면 별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경희대 국어국문과에 입학하면서 그의 시는 좀 더 벼리었다. 조병화·황순원·김광섭 등이 교수로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1967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초기 문제작으로 꼽히는 시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그 이름을 새기었다.

그가 살아냈던 시대는 엄혹했음으로 그의 시는 현실의 고통을 담아냈고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창립에 참여하면서 현실 참여적 성격을 더욱 공고히 했는데 특히 초기 시에는 농민과 노동자 등 민주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고향 전라도와 백제 사람들이 겪는 차별과 한을 노래하는데 쏟아부었다.

그리고 시인 이성부는 1981년 네 번째 시집 <전야>를 세상에 내놓은 뒤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고향이었던 남녘 땅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 때문이었다. 시대의 무게를 함께 짊어졌던 고향사람들이 죄없이 죽어 나가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반역의 시대를 마주하고 그에게서 시의 샘이 말랐다.

그 시절을 그가 택한 것은 자연이었다. 산이었고 바다였으며 너른 들녘이었는데 그것은 아무리 고쳐 말해도 좌절이었으나 또한 도피였다. 후일 그가 토해낸 유배시집은 그의 죄스러움이 고스란하다.

“나는 싸우지도 않았고 피 흘리지도 않았다/비겁하게도 나는 살아남아서/불을 밝힐 수가 없었다. 화살이 되지도 못했다/고향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때/고향이 무너지고 있었을 때/아니, 고향이 새로 태어나고 있었을 때/나는 아무것도 손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인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시인은 생애 일흔한 번째 봄을 코앞에 둔 2012년 겨울 영원한 휴식에 들었다. 그가 꿈꾸었던 희망은 이제 누군가의 몫으로 남을 것인가. 여전히 희망이 허기지는 세상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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