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서 광양여고 3학년

▲ 김민서 광양여고 3학년

안부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말들이 때로는 듣기 거북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가령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에서 끝나면 무색하지 않았을 것을 한 마디씩 더 붙여서 “결혼은 언제 하니?”, “수능은 잘 봤니?”, “취업은 언제 하려고 그러니!”와 같은 좋은 소식이 아니기에 굳이 답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유도하는 질문을 보며 우린 ‘오지랖’이라고 한다.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당사자가 특정 일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예측하며 측은지심이 깃든 질문을 하는 일 자체가 오지랖이 된다. 우리 사회는 남들이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정이 많아 그렇다고 포장하기에는 난처하고 불편해 서로 외면하고 지내려 하면 정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외출이 줄어들고 사람들을 만날 일이 적어지다 보니 개인적인 취미생활을 갖는 등 각자의 삶에 충실하게 되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많아졌고 이는 결국 개인주의적 삶과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시대에 따라 사회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관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과거 공동 농촌 생활에 의한 품앗이와 두레에서 시작해서 주택생활과 마을 문화가 번성했을 시기에는 이웃 간의 정이 오가는 일이 사회적 통념이자 가치관이었다면 지금은 아파트로 인한 개인주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보다는 SNS를 통한 소통 등 각자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팬데믹 상황에서 나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통념이 되었다.

개인주의란 단어가 대한민국에서 선뜻 수긍하기에 눈치 보이며 와락 안기에도 주의가 필요한 건 말에서 떠오르는 장면들이 긍정보다는 부정으로 채색된 적이 많음을 은연중에 동의하는 이들이 다수라고 본다. 본래 개인주의는 국가 권력이나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개입을 받지 않고 독립해 스스로 결정하고 결단하여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용어가 공동체의 이익을 무시한 채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이기주의와 구별되지 않아서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개인주의자들은 절대 무작정 그들만의 이익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그에 대한 반항이 표출되기 마련이다.

선우휘의 ‘불꽃’속 주인공 현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여러 사건을 마주하더라도 소심하고 방관적인 태도로 변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 오히려 된통 꾸지람으로 돌아온 후로는 비판의식을 갖지 않으며 적극성도 잃어 답답하고 나약한 성품으로 일관한다. 현이 선생일 때 학교 교장의 비리를 보고 부당하다고 느끼며 언쟁을 벌이지만 결국 시비를 가리는 비판 대신 사직서를 쓴다. 3.1운동 때 선봉에 섰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런 아들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현재의 삶에 순응하며 목숨 부지에 전력을 다하길 바랐던 할아버지의 삶 사이에서 소심하게 변한 현의 갈등은 태생적으로 비판의식이 내재되어 있었기에 불꽃처럼 터졌다.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언제나 현의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예견된 결말이었다.

사회 속에서 개인주의자들이 필요한 까닭은 그들이 무작정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함과 동시에 각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일들에 나설 수 있고 공동체, 즉 사회의 문제들이 자신과 같은 개개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끝까지 참고 살지 않는다. 정만 내세우기에는 각자의 삶만 살아나가기에도 버거워진 오늘날이 되었다. 그러나 “남의 일을 도우면서 사는 게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좇으면서 살아가는 일”이 결국 각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사실은 불변이다. 마냥 나만 좋은 이기주의자가 아닌 모두가 잘 살길 바라는 개인주의자가 된다면 대한민국은 오지랖보다 따뜻한 이성이 넘실거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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