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윤장순 어머니

서울사람, 서울여자

나는 서울사람이었다. 한때였지만 서울에서 2년 반 정도 생활하는 동안 나는 원래부터 서울여자였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고향에서 제법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고 백합처럼 흰 피부를 가졌으며 숱 많고 윤기 있는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바바리코트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차려입고 외출을 하게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곤 하였다. 저 멀리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의 작은 마을인 박실마을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처럼 보였다. 나는 서울에서 철저히 서울 사람이 되어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오빠들이 돈을 벌기 위해 대처로 나가고 고향인 보성에서 엄마와 단둘이 의지하며 살고 있던 내가 엄마를 홀로 남기고 서울에 올라온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친구들처럼 돈을 벌어서 엄마에게 효도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었다.

기차를 타고 처음 서울로 올라온 나는 서울의 큰 규모와 수많은 인파, 높은 빌딩과 줄선 자가용에 놀랐다. 그러나 메케한 냄새와 탁한 공기에는 숨이 막혔다. 나와는 너무 다른 서울여자들의 차림새가 훅하고 눈에 들어왔다. 예쁜 옷에 뾰족한 구두, 가죽핸드백을 들고 있는 잘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 그리 예쁜지 내 머리 속에는 온통 곁을 스치듯 지난 간 예쁜 숙녀들이 모습으로 꽉 차있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직장을 잡게 되었다. 첫 월급이 나오자 나는 마음속에 숨겨놓았던 쇼핑 목록을 하나하나 펼쳤다. 엄마께 드릴 빨강색 내복과 옷 등을 사서 소포로 보내놓고는 평화시장이라는 서울의 유명한 쇼핑가로 향했다. 눈에 들어오는 원피스를 사고 반짝이는 머리핀도 하나 샀다. 구두와 백도 사고 싶었지만 다음번으로 미루었다.

서울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그간 고향에 있으면서 깊이 감쳐져있던 감각이라는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점차 패션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타고난 패션 감각 덕에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완전한 서울여자로 태어나게 되었다.

서울에 온지 2년이 지난 후부터 엄마는 부쩍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재촉했다. 혼자서 너무 적적하다고 하셨다.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엄마는 내 긴 머리칼을 보더니 관리하기도 힘들고 보기에도 거추장스러우니 자르라고 했다. 엄마는 서울에 대한 나의 기억을 다 잘라버리고 싶었을까? 엄마의 권유가 너무 강력했기에 나는 머리를 잘랐지만 왠지 모를 서러움이 올라와서 밤새 이불을 쓰고 울었다. 그렇게 서울의 추억을 다 잘라버리고 난후 나는 중매를 통해 급작스럽게 봉강 당저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엄마, 우리 엄마

나는 1955년생으로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서 출생하였다. 4남 2녀 중 5째이자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지만 가끔 당신의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주셨던 게 기억난다. 한명의 언니와 네 명의 오빠들이 있었지만 나이차이가 많이 났다. 게다가 오빠들은 직장을 찾아 일찍부터 대처로 떠나버려 집에 있던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였다, 어린 시절 오빠들을 따라서 뒷산에 올라가 흙장난을 하고 미끄럼도 타고 놀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형제가 많았던 우리집이였지만 지금은 셋째 오빠와 막내 동생만 생존해 있다.

엄마와 나는 고향에서 오랫동안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더 친밀했고 더 애틋했다. 엄마에게서는 늘 백합향이 났다. 흰 피부에 단정한 모습, 다소곳한 표정이 백합 같았다. 서울에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결혼을 하게 되어 엄마 곁을 떠나오게 되었다. 그 길이 엄마를 영영 떠나오게 되는 길인 줄 그땐 몰랐다. 내가 결혼 한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 엄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때의 참담함을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상이 다 무너진 기분이었다. “그리운 내 어머니, 엄마의 백합 향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엄마!” 나는 그렇게 백합을 부르며 어머니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학길 담벼락에 붙어 서서 따뜻한 햇살을 쪼이던 내 눈시울 위에 환하게 떠오르던 어머니. 어머니, 나의 눈시울은 어머니를 담은 바다가 됩니다. 어머니의 바다는 나의 바다를 안고도 흘러넘칩니다. (중략) 가야토기의 살갗같이 우울한 듯 안으로 밝고 비바람에 시달린 바위의 살결같이 거칠고도 푸군한 어머니의 손등을 그리고 말 것입니다. 어머니가 끓이시던 시래기국 맛을 그리겠습니다. 어머니. 나를 잡아끌던 어머니의 손이 탯줄인 것을 나는 압니다. 잎진 가지 끝에 바람이 부는 겨울 그립습니다.” <허하만 시, 길 – 박수근의 그림>

님과 함께

나는 19세에 중매결혼을 했다. 남편의 나이는 당시 31세였으니 당시 기준으로 노총각이었다. 남편은 벼, 콩, 팥, 보리, 감자, 고구마 등 다양한 농사를 짓는 청년 농군이었다. 큰딸이 태어나고 둘째 딸이 태어나자 남편은 돈을 더 벌기 위해 포항으로 내려갔다. 3~4년 동안을 가끔씩 포항과 집을 오가는 생활 끝에 광양제철이 생기자 남편은 직장을 광양으로 옮겼고 광양제철에서 정년퇴직을 하였다.

남편은 결혼생활 시작부터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컸다. 결혼 후 첫 생일에 꽃다발선물을 쥐어준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생일을 잊은 적이 없다. 목걸이 같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자상하고 순한 남편이지만 술을 좋아해서 가끔 실수를 하곤 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그것만 빼면 남편은 완벽한 남자이다. 남편과 나는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 그런다보니 남편은 나를 어린아이로 보는 것도 같다. 나의 일 하나하나를 다 챙겨주어 남들은 부럽다고들 하지만 나는 아이가 된 것 같아 조금 머쓱해 지기도 한다. 그래도 무관심한 사람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남 4녀를 두었다. 딸 셋을 줄줄이 낳았다가 4번째로 드디어 아들을 낳았는데 결혼생활 중에서 제일 기뻤던 일이었다. 당시 남편은 포항에 주로 있었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봉강 집으로 곧장 달려와 너무 행복하다며 손뼉을 치면서 아기와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아들과 딸 둘은 지금 멀리 일산에 살고 있고 나머지 딸 둘은 순천과 여수에 살고 있으며 봉강에 자주 놀러 온다.

묘비명에 대하여

나는 사실 페인트칠 기술자이다. 별다른 기술이 없었던 나였지만 아이들이 커가지 학비 등 지출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심적으로 돈에 대한 압박이 커지면서 30년 전부터 우연히 페인트 칠 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은 완전한 베테랑 전문가가 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꽃 중에서 백합을 제일 좋아한다. 엄마를 생각나게 해서일까? 그 진한 향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올리게도 해서일까? 백합 향은 언제나 엄마가 내 곁에 계신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 나의 생은 온통 백합의 향으로 칠해져 있다.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칠했다.

“지금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난/ 목숨의 향기// 캄캄한 가슴 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 별 하나 가슴에 숨어 살아요.// 당신의 부재조차/ 절망이 될 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옷 입은/ 천사의 나팔 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이해인 시, 백합의 말>

글 지도=이미루/그림 지도 =이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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