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새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시인 김광규

  1. 년 서울 출생
  1. 년 문학과 지성 통해 등단

시집 <반달곰에게> 외 다수

오늘의 작가상 외 다수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기저에 자리 잡은 것은 부끄러움이다. 시대와 또 다른 시대를 이어 한 개인이 발을 담고 있는 남루한 현실에 대한 곱씹음이다. ‘혁명’을 꿈꾸었던 청춘이 어느 날 ‘살아가기 위해 살고 있는’ 기성세대가 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이다. 그렇게 소시민의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겨 가는 모습을 통해 시인의 부끄러움은 한 시대를 살아냈던 자의 보편적인 부끄러움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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