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저마을 엄마들의 인생이야기

봉강면 당저마을에 오랜 기간 거주한 어머니 열네 분의 인생이야기가 2020 전라남도 마을공동체 활동 사업의 지원을 받아 ‘꽃詩로 피어난 엄마’로 출판됐다. ‘꽃詩로 피어난 엄마’는 김순남, 김순애, 박희자, 정차순, 주순남, 김외남, 곽옥례, 김복례, 김순임, 윤장순, 남윤애, 정홍련, 황인자, 박만심 씨의 인생이야기를 인터뷰한 후 이미루 작가가 글을 쓰고, 할머니들의 그림과 사진을 함께 담아 엮은 책이다.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을 악착같이 견디며 살아낸 숭고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한다. <편집자주>

▲ 박만심 어머니

무늬만 공주, 고명딸

내 고향은 보성군 조성면이다. 나는 위로 오빠가 둘이 있는 고명딸로 태어났다. 고명딸은 으레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공주처럼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엄마는 여성스럽고 얌전하신 분이셨지만 몸이 매우 허약하셨다. 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엄마가 무슨 병을 앓으셨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지만 며칠을 골골하시며 누워계시곤 했던 일이 빈번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엄마를 도와 어릴 적부터 집안일이며 농사일을 해야 했다. 엄마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나의 할 일도 늘어갔고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를 대신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농부이며 집을 짓는 기술자였다. 주로 진흙을 개어서 벽과 방바닥을 미장하는 일과 구들장 놓는 일을 맡으셨는데 아버지의 집짓는 기술은 인근에서도 유명하여 여기저기에서 집 지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덕분에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았지만 아버지는 이곳저곳으로 무척 바쁘게 다니셔야했다.

이렇게 병약한 엄마와 바쁜 아버지 슬하에서 생활하다보니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세심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고명딸이라는 애칭은 내 삶에서 어떠한 특권으로 발휘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나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육의 혜택에서 제외되는 설움까지 겪어야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내 가슴 속의 깊은 한으로 남아있다.

나는 공주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더욱 더 공주로 살수 없는 길을 향해 들어가게 되었다. 중매를 통해 17세에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어떤 생의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로.....

인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벚꽃이다. 매년 벚꽃의 계절이 돌아오면 나는 벚꽃 속에 피어나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봉우리를 톡톡 터트리며 막 개화한 벚꽃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듯’ 바람결에 쏟아지는 분홍의 꽃비 속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허공을 유영하던 꽃잎들이 내게 떨어지면 그리운 이들이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영원히 피어있을 것 같이 예쁘고 싱싱했던 꽃들도 어느 날 쏟아지는 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고 꽃 진자리에는 잎사귀들이 푸르게 돋아난다. 자연의 섭리를 자연조차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17세에 같은 보성사람과 중매결혼을 하였다. 21세의 그는 큰 아들로서 시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다. 시댁에서의 생활은 친정에서와 거의 같았다. 종일 일속에서 일은 이미 친정에서부터 해왔으므로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진짜 어려운 일은 경제권을 가지고 계신 시어머니가 너무도 인색하셨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용돈은 꿈도 꿀 수 없고 꼭 써야 할 기본생활비 조차도 너무 아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자꾸만 쌓여가자 나는 생활의 즐거움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날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사 직후, 건강했던 그가 시름시름 앓는 일이 잦아졌다. ‘이사를 잘 못 가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미신이 맞기나 하다는 듯 그는 영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다. 결혼 후 3년 만의 일이였다.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나는 결혼 생활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홀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토록 허망하고 원통한 일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머리가 종일 멍하고 아무생각이 나지 않았다.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자녀도 없이 혼자가 된 나의 거취 문제로 시댁과 친정에서 얘기가 오갔다. 나는 양가의 합의 하에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로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광양군 봉강면 당저마을로 거처를 옮겨 지금까지 63년을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서 오게 된 이유는 친척의 주선으로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생에서는 남편과 오래 살아갈 운명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병약한 남편을 섬겨야 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다섯 명의 아이를 남겨두고 남편은 내 곁을 영원히 떠나가 버렸다. 혼인 후 8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하늘을 원망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그리고 억울해서/ 세상의 반대쪽으로 돌아앉고 싶은 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날/ 내게 있었소/ 아무한테서도 잊혀지고 싶은 날/ 그리하여 소리내어 울고 싶은 날/ 참 내게는 많이 있었소” <나태주 시,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

꽃은 이내 졌지만 그 뿌리는 더욱 깊어라

당저의 시댁은 손이 귀한 집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나는 3남 2녀의 다섯 남매를 낳았으니 시댁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남겨진 다섯 아이들을 혼자서 키워야 했다. 처음에는 너무 막막하고 기가 막혔지만 나는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일뿐 이었다. 열심히 농사일을 하였지만 소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 가마니를 짜는 일이었다. 농사일이 끝나면 손이 닳도록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짰다. 거친 지푸라기를 따라 내손도 더욱 거칠어져 갔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며 다섯 남매를 키웠다.

아이들은 나의 고생스러움에 보답이라도 하듯 착실하게 자라주었다. 공부도 열심히 잘 하여서 대학까지 무난하게 들어갔고 지금은 사회에서 안정된 자리에서 잘 살고 있다. 남편이 남기고 간 꽃 진자리에 아이들은 무성한 잎을 내었으며 뿌리를 더 단단히 내려 남편의 나무를 더욱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주었다.

5남매는 남편이 내게 준 진정한 값진 선물이며 보석이다. 가장 흐뭇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은 자녀들의 결혼식이었다. 남편 없이 모진세월을 홀로 키우며 견디느라 힘들었지만 ‘큰 탈 없이 잘 자라서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여보, 내 할일 다 한 것 같아 너무 기뻐요. 나 잘했죠?”라며 하늘의 남편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무사히 부모노릇을 한 것 같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자녀들이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아이들마저 없었다면 지금까지 한 순간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고생한 것도 다 잊고 싶다. 그저 아무생각 없이 날마다 순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 마을회관친구들과 같이 잘 지낼 수 있어서 행복한 날들이다.

묘비명에 대하여

어느덧 86세가 되어버렸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지만* 나는 5남매를 대학까지 보내고 결혼도 시키고 이제야 걱정 없는 행복한 날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그간 수고하고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상을 주며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싶다.
- 꽃은 한창일 때 져버렸으나
나는 남아서 무성한 가지를 내고 뿌리를 깊게 하였다.
고맙다 박만심 -

* 정호승 시인의 시 차용
글 지도=이미루/그림 지도 =이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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