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도 젖은 자는- 순례1 - 오규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순례1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 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 시인 오규원

  1. 년 경남 밀양 삼랑진 출생
  1. 년 시 ‘몇 개의 현상’ 추천 완료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외 다수

이산문학상 외 다수

시인 오규원은 유년이 끝나면서 도시로 떠돌았던 삶을 시로 옮겼다. 유복하게 태어났으나 일찍이 세상의 끈을 놓아버린 어머니의 부재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과 겹치면서 심리적 상처와 의식의 변형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런 그의 시를 잡아준 이는 김현승이다.

그리고 부표처럼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 끝에 그는 아주 고약한 시를 써대기 시작했다. 언어에 집착하더니 언어를 비꼬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그의 시는 형식 파괴, 관념 해체라는 영역을 넘나들기를 즐기더니 서정시에 안주하려던 독자들의 기대를 아주 불쾌하게 만드는 데까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간다.

물론 의도된 것이다. 시인은 이를 통해 우월한 세계에 사는 존재처럼 나풀대는 인간의 가벼운 속성이 사실 물질주의, 아니 물신적 차원에 허우적대며 사는 매우 저급한 존재임을 까발리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시의 타락도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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