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시문화관광해설사 정순배 옹

▲ 정순배 옹
창간 준비로 한참 정신없던 지난해 12월 중순, 광양시민신문 사무실로 70대를 넘긴 듯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헤진 점퍼차림에 오래된 모자를 눌러쓰고 특히 낡은 운동화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손에 든 서류뭉치만 아니었다면 막 들일을 끝내고 하루치 노동이 주는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마을 선술집을 찾아 들어서는 늙은 농사꾼의 모습이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서는“ 시민주를 모아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주머니 속에서 꾸깃꾸깃 접힌 만 원권 지폐 다섯 장을 꺼내 놓았다.“ 비록 작지만 광양시민신문 창간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가 주머니를 뒤져 내놓은 구겨진 만 원권 지폐 다섯 장이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지역 곳곳에 터를 잡고 묵묵히 제 일을 사는, 들풀 같은 분들이 참여해 만드는 신문이 바로 우리들이 꿈꾸는 풀뿌리 지역신문이잖은가. 며칠 뒤 그가 다시 사무실을 찾아와 만원 한 장을 더 청약했다.“ 지난 번 액수가 너무 적어 미안하다”는 말씀에는 차라리 송구스러울 밖에.

어렵사리 찾은 그의 집은 작고 초라했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겨울 한복판인데도 군불을 때지 않아 방 안은 살을 에는 한기가 수북하다. 방바닥이 얼음처럼 차 곧 발가락이 시려왔다. 이불을 겹겹이 깔아놓았지만 그것으로 겨울 추위를 물리는 일은 애당초 무리였다.“ 누추해서 손님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수없이 이 말을 되뇌었다.

취재를 부탁하자 그는“ 저 같은 사람 인터뷰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욕합니다. 딱히 해줄 말도 없고…안 되는 일입니다. 잠깐 말씀이나 나누고 가시지요”며 손사래를 쳤다.
본전도 못 찾고 쫓겨날 처지에 몰린 상황인데 마침 그의 부인이 호박죽을 내왔다.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다며 면구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가득 담았다.
호박죽 옆에는 박카스 한 병, 그 모습에 살포시 웃음이 번진다.

그의 이름 정순배. 1939년 생으로 옥룡면 추동마을에서 태어나 올해 일흔넷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자신에 얽힌 이야기를 극구 사양하는 그가 서걱거리는 목소리로 간간히 풀어놓은 조각 같은 말들을 모아 붙이면 대략 이러하다.
어렵던 시절 명지대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다녔으니 성장기 유복한 집안환경이 미루어 짐작된다. 결혼한 뒤엔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자녀들은 총명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대학까지 마쳤다. 둘째는 워싱턴 굴지의 회사에 별 어려움 없이 입사할 정도여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시련은 곧 찾아왔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밝힐 수 없지만 그렇게 총명하던 두 아이 모두에게 정신장애가 찾아온 것이다. 청천벽력, 그것은 한 개인이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고통이지 않았을까. 사연에 대해 그는 말하기를 극도로 꺼렸지만 곁에 있던 부인이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빈 몸으로 이곳 추동마을 고향으로 돌아와 당신 손으로 아들을 직접 병원에 입원시켰다고 일러줬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편 고향에 내려온 그는 순천대학교 사범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만학이었다. 동급생들은 손자뻘이었지만 교사, 그것은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아쉬움이자 꿈이었음으로 개의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61세 되던해 졸업했다.

초임지는 여수시 거금중 초도분교에서 영어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거금중 초도분교에서 계약직 교사로 4개월동안 근무했다. 당시에는 오지를 찾는 선생이 많지 않아 사회과목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고 사실 영어과목보다 사회과목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지금 그가 광양시문화관광 해설사로 일하는 계기다.

“영어는 자신이 있었지만 국사와 사회일반 등이 포함된 사회과목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부족했어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니 막막할 수밖에요. 그래서 사회과목에 관련된 서적들을 사다 모으고 무작정 읽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우리지역의 역사에 애정이 갔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역사에 눈길이 머물렀다. 광양만의 역사는 임진왜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탓이다. 이순신은 물론 정운 장군, 무엇보다 물길의 들고나는 시기를 귀신처럼 알아 왜군을 격파하고 이순신의 전승을 견인한 광양현감 어영담의 삶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다.

현재 그가 밤낮을 두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것도 바로 광양현감 어영담이다.
그는“ 어영담은 임진왜란과 이순신의 승전을 이야기를 할 때 결코 빼놓을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공적에 비해 그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한지역의 현실이 안타깝다”며“ 광양의 보물과도 같은 어영담을 재발견하고 역사적 위치를 바로 세우는 일도 지역신문이 할 일”이라고 당부했다.

공식적인 그의 직업은 광양시문화관광해설사다. 광양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의 행사장을 찾는 일은 더 큰 즐거움이다. 우리지역 문화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아 스토리텔링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에는 광양시 스토리텔링 공모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래선지 말미에“ 한 지역의 문화는 그 지역의 정체성과 궤를 같이 한다”며 “지역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쉽지 만은 않은 인터뷰를 끝내고 차에 올랐다.“ 부디 조심히 가시라”며 차가 멀찍이 멀어질 때까지 골목을 지키고 선 그의 등 뒤로 저무는 겨울 햇살이 눈부시다. 아니 솜이불을 가슴에 품은 것처럼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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