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 신현림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신현림

1
불타는 구두, 그 열정을 던져라
지루한 몸은 후회의 쓸개즙을 토하고

나날은 잉어떼가 춤추는 강을 부르고
세상을 더럽히는 차들이 구름이 되도록
드럼을 쳐라 슬픈 드럼을 쳐라

여자인 것이 싫은 오늘, 부엌과
립스틱과 우아한 옷이 귀찮고 몸도 귀찮았다
사랑이 텅 빈 추억의 골방은 비에 젖는다
비 오고 허기지면 푸근할 내 사내 체온 속으로
가뭇없이 꺼지고 싶다는 공상뿐인 내가 싫다
충치 같은 먼 사내는 그만 빼버리죠 아프니까요
당신도 남자인 사실이 고달프다구요
인간인 것이 참 힘든 오늘 함께 산짐승이나 되어
해지는 벌판을 누비면 좋겠지만
인간이라는 입장권을 가졌으니 지루한 제복을 넘어
닫힌 책 같은 도시와 사람 사이에서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응시하고 고뇌하고 꿈꾸며 전투적으로 치열하렵니다.

2.
저는 고요히 불타는 구두를 신은 여자가 좋습니다.
실존의 화면을 꽉 채우는 여자는 뭔가 대륙적인 여자
전혜린, 바흐만, 섹스턴, 베아트리체 달, 아자니,

<적, 그리고 사랑 이야기>의 레나올린, 제니스 조플린, 프리다 칼로,

그리고 익명의 불타버린 여자
묘지로 가기 전의 흐뭇한 식사죠 대리만족의 기쁨
덧없을지라도 각성을 줍니다.
그들의 마력은 빙판에서 자란 초목 같지요
그들의 운명 그들의 영화는 왜 비극으로 끝나나요
당신은 인생께 뭘 기대하나요 지구폭탄을 위해 뭘 하시나요
제가 그리운 분 손들어 보세요 파리채만 손드는군요

당당하고 기품 있는 신한국여성으로 떠나기 전에
한계령을 따라부릅니다 파스처럼 쑤시는
브래지어를 벗고 빈몸뚱이 저를 그립니다
자유로운 영혼과의 상봉이 그리우니까요
그래도 지겹게 믿고 희망하는 것은 무얼까요
<사랑은 죽음과 하나>를 씁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있을 때 비로소
나도 존재합니다. 그것은 빨간 바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깊고 맹목적인 충동이겠죠
내가 너의 뺨을 만지면 나는 살게 하는 힘
서로를 잃지 않으려고 깨어있게 하는 힘
그래, 잃는다는 것은 죽음만큼 견디기 힘든 것
삶은 지겹고 홀로 괴롭고 잃는다는 것을 견디는 일
못 견디는 자, 진흙과 흰꽃을 먹으며 바다로 걸어가고
남은 자는
그가 남긴 가장 정겹고 슬픈 그림자를 안고
한없이 무너지는 바닷가를 배회하며 흘러갑니다

불타는 구두가 싸늘한 눈보라가 되도록

※ 시인 신현림
- 1961년 경기도 의왕 출신
- 현대시학 시<초록말을 타고 문득> 발표
- 시집<세기말부르스>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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