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날벌레가 되어 - 유하

한 마리 날벌레가 되어
유하


1
선운사 대웅전 지나는 산길
나무 백일홍 꽃잎들 어둠 속 백열등처럼
환하게 떨어져 있다
탄성보다 먼저 한 마리 날벌레가 되어 아득하게
그곳으로 안기는 몸
꽃자리 속에 한 이틀 푹 꺼지고 싶다
개울물이 쌀뜨물 같은 트림을 하며 넘어오고
닿을 듯 말 듯
수평목의 손바닥이 보여주는 손금
죽음은 눈이 멀어서
손에 짚이는 건 날벌레의 욕정인 것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2
동호 바다 가는 길,
저 갈매기는 같은 길로 나는 법이 없다
해변에선 농아원에서 온 연두색 유니폼의 소녀들이
카세트 테이프 리듬에 맞춰 람바다 춤을 추고
말 못 한다고 마음 없는 게 아닌데
동호 바다는 그냥 무표정이다
또 모르지, 그 무심의 심연 속에
람바다 같은 관능의 타오름이 있는지
아까부터 돌아앉아 그물코를 꿰는 어부의 어깨도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만져지지 않는 삶의 물결이, 여기 있구나
말없는 몸들의 저 쓸쓸한 율동
람바다는 저 혼자 목이 쉬고
비린 물고기 비늘 같은 나날들
또 얼마나 침묵으로 生을 흔들어야 하는가
몸 안의 날벌레는 자꾸 어디론가 가자고 머릴 부딪고

※ 시인 유하

본명 김영준

  1. 년 전북 고창군
  2. 년 계간 <문예중앙> 등단
  1. 년 시집 <무림일기> 외 다수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연출

 

유하는 시인이자 영화감독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의 시를 처음 대했던 느낌은 여전히 생생하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별 희한한 시를 쓰는 놈이 있네” 쯤이 아니었을까.

첫 시집 <무림일기>는 무협지를 그대로 베껴다 쓴 것이었는데 학창시절 만화방을 전전하며 무협지를 깊게 섭렵했던 상당한 내공이 느껴졌다.

그의 시집과 같은 이름을 가진 영화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에서 등장하는 싸구려 무협소설 작가 영훈은 유하 자신의 모습을 담은 캐릭터이기도 한데 매혹의 세계로 침몰하는 잡인들이 화려함을 쫓다가 어느 순간 불이 꺼지면 유령처럼 사라지는 영역이다. 그의 시를 가볍게 읽다가 홀연 쓸쓸해지는 이유다.

유하의 시는 바로 그 같은 인간의 욕망과 내면을 비유적으로 그려내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시인이다.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비열함과 위선을 시에서나 영화에서나 비웃음 섞인 풍자로 까발리는 데 별다른 주저함이 없다. 오히려 장난스러운 시선이 얽힐 정도다.

한편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로 감독에 데뷔한 유하는 이후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하울링> 등 꾸준한 작품을 내놓으면서 동시대 다른 감독과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도 비열한 인간의 욕망과 그에 대한 천착이 끝나지 않았음을 숨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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