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 허수경

수박
허수경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한 땅의 열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 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은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시인 허수경

  1. 년 경남 진주 춣생
  1. 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2. 세기 전망’ 동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외 다수

  1. 년 동서문학상 수상
  1. 년 10월 위암 졸

허수경 역시 죽어갈 때쯤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난 것들에 대한 기억들 말입니다.

더 붉고 더 빠르게 피가 도는 청춘의 시절엔 사랑 앞에서도 모난 것들이 튀어나오는 법이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으니 반역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숱한 분노와 절망, 그리고 희망마저도 가시가 돋아 있게 마련인 날것의 기억.

시간이 흘러 세월이 쌓이더라도 쉽게 감추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어서 사는 내내 누군가와 끊임없이 부딪히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 일처럼 부딪히고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순해지는 시간이 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게지요.

허수경이 <수박>을 보면서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둥굴어진다는 것에 대한 이해인 듯 보이겠으나 정작 둥굴어진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목도하게 되는 게 일이지요. 모난 부분들이 깎여 기어이 순한 눈을 갖게 되면 비로소 보이는 게 ‘둥굶’이라는 놈의 실체입니다.

그 ‘둥굶’ 안에 별처럼 알알이 박힌 인생들이 붉게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가 쉽지만은 않겠으나 또 그리 어렵지도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라고 다르지 않아서 가끔은 분노를 머금기보다 “허허” 웃고 마는 일이 잦아집니다. 나이 쉰 무렵에 접어들면서부터입니다. 하여 쉰넷에 세상을 버린 시인 역시 순한 눈으로 ‘둥굶’의 삶을 눈치챈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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