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렬의 쉴만한 물가

▲ 라종렬 목사
역사(歷史)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책과 정의들이 있습니다다. 역사는 실록(實錄), 현재와 과거 의 끊임 없 는 대화(E.H.Carr),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다 등 등의 보편적인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런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실에 대한 내용과 평가는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든 그런 역사를 바로 알아야 전철(前轍)을 밟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고 하지요.

개인적으로, 역사는‘ 누가 왕이냐’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목표(目標)로 살아가느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무엇이 되느냐, 누구를 따라 사느냐, 누구의 통치를 받고 있느냐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주인(主人)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개인적인 꿈이든, 가문의 전통이든, 국가적인 목표든, 왕(주인)을 따라서 인생도, 가문도, 국가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형태에 따라서 신정(神政), 왕정(王政), 민주(民主), 자본주(資本主), 제국주(帝國主), 군국주(軍國主), 공산주(共産主), 사회주(社會主)등의 통치형태가 생기게 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통치(統治)하고 싶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무엇인가를 추구(追求)하며 살아갑니다. 오래도록 독재(獨裁)에 길들여진 이 나라의 국민성(國民性)은 민(民)이 주인(主人)이면서도 카리스마라고 포장된 강력한 지도자를 선호하는 모습은 미련스럽기까지 합니다. 불편한 사실은 이런 경향은 결국 실속만 차리고, 불편한 일은 힘으로 밀어붙이고, 귀찮은 일은 무관심하고, 지극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 양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실용주의(實用主義)의 폐단의 극치를 맛보고 있습니다.

심부름꾼이면서도 왕노릇하는 정치인을 민(民)이 직접 뽑는 제도가 선거입니다. 왕이 백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왕을 선택하는 권한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뽑기 전에는 일꾼이라 하고, 뽑힌 후에는 통치자(統治者)로 돌변하는 불편한 진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린 또 다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왕인가?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민이주(主)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고, 태도가 변하지 않는 사람을 뽑아야 하겠는데, 국민 수준이 그렇게 밖에 안되나 하는 후손의 평가를 받지 않도록 꼼꼼하게 살펴보고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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